왼쪽 허벅지가 아팠다. 큰 부상은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참고 던질 만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1이닝만 더 던지면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넉넉했던 점수차였다. 그러나 채병용(32, SK)은 벤치를 향해 교체 사인을 냈다. 잘 던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채병용은 마운드를 걸어 내려갔다.
지난 5일 문학 롯데전에서의 이야기다. 채병용은 7-3으로 앞선 5회 마운드에서 사실상 자진 강판했다. 큰 부상은 아니었기에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채병용은 11일 문학 넥센전이 끝난 이후 당시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놨다. 채병용은 “참고 던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약 내가 못 던지면 팀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안 되겠다는 사인을 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채병용은 시즌 중반 이후 하락세가 뚜렷했다. 한 차례 고열 증상을 앓은 뒤 구위가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만수 SK 감독도 “시즌 중에 그렇게 한 번 몸에 힘이 쫙 빠지다보니 다시 힘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평균자책점은 계속 떨어졌고 한 때는 피홈런이 많아져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채병용도 “최근 몇 경기가 계속 안 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생각하는 공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컨디션은 정상이었다는 의미다. 결국 채병용은 “심리적인 문제였다. 정신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한 경기만 풀리면 잘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쉬웠다”라고 원인을 짚었다. 결국 딱 한 번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채병용의 필사적인 의지는 근사한 반등을 만들어냈다.
채병용은 11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넥센과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4피안타 2볼넷 1탈삼진 2실점 역투로 완투승을 따냈다. 비록 강정호 김민성이 빠진 넥센 타선이었지만 여전히 한 방이 있는 팀을 상대로 완투승을 따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한편으로는 2002년 6월 27일 수원 현대전 완봉승 이후 4459일 만의 완투승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잊지 못할 날이었다.
필사적으로 던진 탓인지 경기 후 채병용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으로는 이제야 팀에 도움이 됐다는 안도감도 묻어 나왔다. 채병용은 “그간 팀에 너무 도움이 안 됐다. 내가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라면서 그간의 마음고생을 에둘러 표현했다. 마음의 부담을 덜어냈다는 측면에서 채병용에게는 더 값진 승리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SK는 4위 LG를 1경기차로 쫓고 있다. 잔여경기 성적에 따라 역전 4강도 가능하다. 채병용의 완투승은 선발 로테이션 정비의 가능성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SK는 김광현, 트래비스 밴와트라는 확실한 원투펀치를 보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믿을 만한 선발이 채병용이었는데 그간의 부진을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SK도 선발 싸움에서 해볼 만한 전력을 구축할 수 있다.
채병용도 이를 알고 있다. 이날 경기를 계기로 지금까지의 부진은 잊어버리고 앞만 내다본다는 심산이다. 채병용은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1승, 1승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10승에 큰 욕심이 없음을 드러내면서 “지금부터는 어떻게 던지느냐가 중요하다”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바라던 한 번의 반전을 만들어낸 채병용이 SK의 역전 4강행에 마지막 퍼즐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SK와 마찬가지로, 채병용의 시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