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삶은 통신사 광고가 아님에도 빠름이 미덕의 동의어가 된 지 오래다. LTE를 안 쓰면 마치 시대에 뒤쳐진 구닥다리 같고, KTX와 비행기에서도 랩톱을 켜고 뭔가라도 몰두해야 할 것 같은 강박과 조급증에 시달린다. 덕분에 모든 게 빨라졌고 편해졌지만 과연 우리는 그 아낀 시간에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걸까.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중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슬로우 비디오’는 단순히 ‘안단테’를 강조하는 영화가 아니다. 바쁘게 살더라도 중요한 건 놓치지 말자고 속삭이는 아랫목 같은 휴먼 멜로다. 또 테트리스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막대처럼 급한 일부터 처리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면 언젠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거라고 옐로카드를 꺼내 보여주는 섬뜩한 우화로도 다가온다.
이름과 달리 소심한 은둔형 외톨이 여장부(차태현)는 10년 만에 골방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뭐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하듯 즐겨보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최민수 형님을 현실에서도 만나보고 싶었던, 막연한 호기심이 불러낸 예정된 가출이었다.

신체적 핸디캡을 숨긴 그가 얻은 직장은 동네에 설치된 수백 개의 폐쇄회로 TV를 모니터하며 범죄를 예방하는 통합관제센터. 남들보다 뛰어난 눈썰미와 디테일 덕분에 범죄자와 수배 차량 검거에 혁혁한 공을 쌓지만 어쩐지 장부는 한 번도 웃거나 으쓱해하지 않는다. 그의 초인적인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불안과 절망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하는 농약 묻은 사과이기 때문이다.
회색 콘크리트 익명의 도시에서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지켜보며 혼자 키득거릴 무렵, 그의 초등학교 첫사랑 수미(남상미)가 CCTV에 포착된다. 벼랑 끝 사채빚 독촉에 시달리지만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씩씩한 ‘택배녀’ 수미의 등장으로 장부의 심장은 간만에 쫄깃해지고, 이 설렘은 그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큰 결단과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마중물이 된다.
4년 전, 마지막 10분의 감동으로 모든 걸 용서하게 했던 ‘헬로우 고스트’의 김영탁 감독은 그때 같은 충격 반전 대신, 초반부터 재미와 감동이라는 군불을 지피며 승부수를 아끼지 않는다. 주인공이 앓는 동체 시력이란 희귀병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장부가 틈날 때마다 정성스레 그리는 마을 지도와 복선인 발자국 수로 긴장감을 쌓아간다.
메인 카메라와 동시에 작동되는 B카메라 활용을 최소화하며 의도적으로 컷 수를 줄인 건 그만큼 서사에 자신있고 인물의 감정 주목도를 높이겠다는 연출자의 의도로 읽힌다. 여기에 차태현 하면 떠오르는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 연기에서 차별화한 것도 자칫 모험일 수 있었지만 튀거나 궤도를 벗어나진 않았다는 느낌이다. 대부분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다보니 차태현 본인 뿐 아니라 감정을 주고받아야 할 상대역 오달수 남상미가 서로 벽처럼 느껴졌을 텐데 의외로 안정된 케미를 끌어냈다는 인상도 받았다.
박장대소는 아니지만 잽처럼 여러 번 나온 웃음 포인트도 재치가 느껴졌다. 모세혈관처럼 좁은 골목만 오가던 마을버스가 동해 바다로 가기 위해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모습, 은행잎을 한 아름 안고 시무룩해하는 수미의 표정과 좌충우돌 오디션 에피소드, “이러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라며 버럭 고백하는 최민수의 드라마 속 명 장면도 반가웠다.
괴력의 연기파는 아니지만, 가성비 높기로 유명한 차태현의 정성을 다한 진심 연기가 곳곳에서 감지된 건 ‘슬로우 비디오’의 최대 강점이다. 세상과 부모, 어느 누구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자신에게 찾아온 얄궂은 운명을 덤덤하게 순응하며 토닥거리는 모습은 많은 관객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 같다. 영악하게 울고 싶은데 뺨 때리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외로워하거나 자책하지 말자’며 선뜻 어깨를 내주는 휴식 같은 102분짜리 영화다. 10월 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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