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기자가 10월 영화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슬로우 비디오’ ‘제보자’ 같은 미들급 영화들이 동시 개봉하는 올 가을 극장가는 개별 영화의 흥행 여부 못지않게 한국 영화의 밑그림과 패러다임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중대한 변곡점에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동안 한국 영화는 충무로나 지방 극장주의 토착 자본기를 거쳐 20년 전 VHS 홈비디오 시장을 겨냥해 삼성과 대우 등 대기업이 영상사업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영화에 진출하며 1차 도약기를 맞았다. 돈 되는 외화를 극장에서 틀려면 수입업자들이 의무적으로 한국 영화를 제작해야 했던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시절 얘기다.
이들이 철수한 뒤엔 정부 모태 펀드와 창투사 자금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 게임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예산을 편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금융권 돈이 보태지며 벤처 자금 형식으로 방화 제작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최초 블록버스터인 ‘쉬리’가 이런 훈풍의 수혜자이면서 이런 분위기의 물꼬를 튼 영화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투자 대비 회수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너나없이 유입됐던 이런 핫머니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반복하며 몇 년 안 돼 고스란히 문제를 노출했고, 1997년 CJ를 시작으로 롯데, 쇼박스가 거대 자본을 무기로 멀티플렉스 사업에 뛰어들며 새로운 점령자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극장 사업과 통합전산망을 구축하며 영화 유통을 질적으로 개선한 이들 대기업은 부동산 자본 성격인 멀티플렉스 사업을 운영하며 이곳에 장착할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다. 케이블 채널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견한 CJ와 쇼박스가 특히 경쟁적으로 라이브러리 확보에 나서며 영화계 판돈도 커지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KT, SK 같은 통신 자본이 영화계를 한 차례 거쳐 갔고, 한화도 광고회사 한컴을 앞세워 영화 투자, 제작에 뛰어들었다. 몰락한 대우 역시 ‘영상 산업은 우리가 원조’라며 과거 영광을 재연하기 위해 이 싸움에 가세했지만 자본력과 기획력의 낭패를 본 뒤 조용히 보따리를 싸야 했다.
코스닥 광풍과 맞물리며 한국 영화에 가장 많은 돈이 밀려들었던 건 2000년대 초였다. 당시 ‘입봉’ 못 하는 감독은 사람도 아니었고, 강남 일식집과 룸살롱이 영화인들 때문에 유지된다는 말이 돌던 그야말로 거품기였다. 영화사에서 기르던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가 떠돌던 때였다. 자연히 한 해 개봉 편수가 50~60편에서 갑자기 100편으로 급증했고, 하루 반짝 극장에 걸렸다가 사라지는 ‘반나절’ 영화까지 등장했다.
이런 버블은 고스란히 수익 악화로 직결됐고 횡령, 배임으로 구속되고 야반도주하는 영화 제작자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빛을 보지 말았어야 할 영화까지 개봉되며 한국 영화는 예정보다 일찍 또 한 번의 시련기를 맞게 된다. 흥행 작가들의 집합소였던 서울 신사동 삼화모텔이 문을 닫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당신이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 수준이 꽤 높아졌다고 느꼈다면, 그건 이 같은 혹독한 빙하기를 견디며 진짜 실력자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껍데기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씨네2000 이춘연을 비롯해 명필름 심재명-이은, 비단길 김수진, 주피터 주필호, 삼거리 엄용훈 같은 실력과 근성을 겸비한 한국 영화 파수꾼들이 자본과 건강한 긴장 관계 속에서 시나리오 개발에 전력투구한 결과다.
지금 한국 영화는 또 한 번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서있다. 2005년부터 투자 수익률이 평균 15%를 상회하면서 새로운 자본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화 수입에 이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한국 영화 투자배급에 뛰어든 다우기술과 ‘런닝맨’ ‘슬로우 비디오’ ‘곡성’에 잇따라 투자하는 20세기폭스코리아가 뉴 캐피털로 링에 오른 것이다. 이를 위해 두 회사는 쇼박스와 CJ에서 10년 넘게 일한 베테랑 간부를 영입해 빅3를 긴장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다. CJ 출신 임직원들로 꾸려진 새 배급사 WAW가 법인 등록을 마쳤고, ‘제보자’의 메가박스플러스엠과 키움닷컴도 이미 컨텐츠 투자에 발을 담궜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결성한 리틀빅도 올 여름 ‘소녀괴담’을 시작으로 투자배급에 가세했고, 올 가을 임권택 감독의 ‘화장’과 최근 블라인드 시사에서 무려 4.6점(5점 만점)을 받았다는 ‘카트’로 진검 승부에 나선다.
오래도록 메이저에게 인정받지 못해 낙담한 백수 감독과 작가들은 절대 지금 짐을 싸선 안 된다. 수퍼 갑이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리그, 승자 독식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시나리오를 냉정하게 평가받을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다. 새로운 자본은 기득권 인력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흙속의 진주를 한 발 먼저 캐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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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기술에서 투자한 '나의사랑 나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