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쪼개기] '미생' 우리는 왜 민폐 낙하산에게 몰입하나
OSEN 이혜린 기자
발행 2014.10.18 11: 43

생각해보면 무능력한 낙하산 만한 민폐도 없다.
맨 몸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또 뚫어야 하는 사회 조직에서 운 좋게 무혈입성해서 자기 몫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놓고 아마도 경쟁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낙하산은, 절대 근처에 두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가 믿을 만한 '빽' 하나 없는 보통 시청자들의 몰입을 끌어내기가 어려운 건 물론이다.
그런데 지난 17일 첫방송에 나선 tvN '미생'은 바로 이 민폐의 입장에서 시청자들이 함께 울고 슬퍼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임시완이 연기하는 주인공 장그래는 평생을 바친 바둑에서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고졸 검정고시 스펙 하나로 잘나가는 무역회사 인턴으로 입사한 26세 청년. 자기 덩치보다 큰 양복을 입고, 복사기 하나 제대로 못만지는 이 청년은 그저 꿋꿋하게 버티는 능력 하나만 장착해둔 상태다. 당연히 여러 사람이 귀찮아진다. 당장 실무에 투입할 인력이 필요한 과장, 그래의 '멍청한' 질문을 다 받아줘야 하는 사수, 매사 도움을 줘야하는 동기 모두가 안그래도 힘든 직장생활이 더 꼬인다.
같은 기간 '더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는 고스펙 동기들이 가질 박탈감도, 그저 얄미운 악역들의 악행 동기로만 치부하기엔 꽤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장그래를 둘러싼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리얼해보인다. 장그래가 이를 향해 분노라도 터뜨리거나 곧바로 실력으로 제압해버린다면, 세상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되겠지만 장그래는 묵묵히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고, 실력 입증에도 실패하면서 보통 사람에 가까워진다. 억울한 상황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멍한 표정이나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가 가진 '무능력' 또한 많은 사람들이 겪어봤던 일이기도 하다. 고작 입사 10일차 동기들이 비현실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일반 신입사원의 고충을 모두 장그래에게 몰아줬다. 전화 받기, 복사하기, 상사에게 말 걸기가 가장 어려웠던, 열심히 해봤자 칭찬 한마디 듣기 어려웠던 신입사원의 설움이 장그래를 통해 묘사된다. 동기간 경쟁에서 여러 상처를 받아본 기억이 있다면 몰입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장그래를 이같은 보통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비현실적인 악역을 만들어야 했던 점은 아쉽다. 실력만큼이나 품성, 평판이 중요한 직장 조직에서 대놓고 학력 차별 멘트를 날리거나, 동기를 골탕먹이고 이를 외부에 떳떳하게 밝히는 1차원적 괴롭힘은 발생하기 어렵다. 보다 더 은근하고, 그래서 더 괴로운 갈등이 나타나야 진짜 현실성을 획득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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