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최근 만난 한 멀티플렉스 프로그래머는 “손님이 워낙 안 들다보니 원 플러스 원 패키지를 기획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마트에서 파는 묶음 상품처럼 입장권 한 장을 사면 나머지 한 명은 공짜로 영화를 보게 하는 커플 할인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키로 했다는 거였다. 각오를 단단히 했음에도 비수기 한파가 극심하다는 하소연이었다.
이는 수치로도 간략히 입증된다. 화요일이던 지난 21일, 박스오피스 톱10 영화의 총 관객 수는 고작 17만명 선. ‘공범’ ‘그래비티’ ‘화이’가 상영됐던 작년 이맘때에 비해 약 20% 삭감된 수치다. 학생들의 중간고사와 행락객 여파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이에 대한 관객들의 불만을 들어보면 극장 측과 온도차가 있다. “솔직히 요즘 돈 주고 볼만한 영화가 별로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여기에 올 여름 정신없이 휘몰아친 ‘명량’ ‘해적’ ‘군도’를 보느라 과다 지출한 관객들이 최근 문화비 지출을 줄인 것도 하나의 이유다. 이른바 여름 대작에 따른 피로감이다.

요새 극장가 풍속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삭줍기’ 행보가 아닐까 싶다. 150만 관객을 돌파한 로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그나마 박스오피스 1위를 놓치지 않고 선전하고 있지만, 가을 극장가를 견인하는 대표 주자로 부르기엔 다소 미진하다. 그 뒤를 쫓고 있는 ‘드라큘라’ ‘제보자’도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기는 마찬가지. 오는 23일 링에 오르는 신작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당분간 비수기 탈출은 요원해 보인다.
조진웅이 ‘분노의 윤리학’ ‘용의자X’ 이후 2년 만에 주연 도전에 나서는 ‘우리는 형제입니다’를 비롯해 외화 ‘나를 찾아줘’ 윤계상 주연 ‘레드카펫’ 등이 개봉하지만 낮은 예매율과 티케팅 파워가 부족한 배우들의 출연작이라는 점에서 고전이 예상된다. 오는 11월 6일 개봉하는 SF 대작 ‘인터스텔라’가 이들을 제치고 예매율 1위를 달리는 기현상도 23일 개봉작에겐 불길한 경고등이다.
한 극장 관계자는 “대형 배급사 작품이 없는 10월 셋째 주는 경량급 영화들의 이삭줍기 경쟁이 한창 벌어지는 시기”라고 말했다. 롯데나 CJ 같은 극장을 거느린 대기업 배급사 작품이 없는 틈을 노리고 쇼박스, 프레인글로벌 같은 회사 작품이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누리픽쳐스가 투자 제작한 ‘레드카펫’은 촬영을 마친 지 1년도 넘은 창고 영화로 극장 보다 IP TV 쪽에 더 기대를 거는 영화다.
그렇다면 지루한 박스권에 갇힌 극장가 비수기는 언제쯤 종료될까. 확실한 한 방을 갖추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낼 만한 좋은 작품의 등장이 그 신호탄이 될 것이다. 영화계에선 이달 30일 개봉하는 ‘나의 독재자’와 11월 잇따라 선보이는 SF 블록버스터 ‘인터스텔라’ ‘카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울컥한 부성애 코드를 담고 있는 ‘나의 독재자’는 배급시사 이후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 비수기 종결자 영화로 꼽힌다.
여기에 지구를 구하기 위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우주로 향한다는 다소 식상한 줄거리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란 점에서 ‘인터스텔라’가 극장을 붐비게 할 외화로 분류된다. 을을 상징하는 비정규직의 울분을 담았다는 점에서 ‘도 아니면 모’로 평가받는 명필름의 ‘카트’까지 합류하면 11월 극장가가 다시 한번 문전성시를 누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세 작품 모두 자신만의 필살기가 확실하고, 전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대주로 평가받고 있다.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으면서 서울과 지방 영화의 구분이 사라진 것처럼 이제 비수기, 성수기의 경계도 차츰 모호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비긴어게인’의 사례처럼 훈훈한 영화는 굳이 호객 행위에 나서지 않아도 관객이 먼저 알아봐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영화 제작사와 투자사들은 지금 같은 선불이 아닌 후불제라도 관객에게 당당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영화를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질소 포장으로 소비자를 우롱했다가 놀림감이 된 과자 회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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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재자', '카트'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