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의 존재기반은 팬이다. 이 명제는 사실 모든 프로스포츠에 적용된다. 그렇지만 구단의 운영방침이 항상 팬들의 여론을 따라가는 건 결코 아니다. 전문가의 판단능력이 필요한 영역까지 팬 의견을 따르긴 힘들다.
이제까지 프로야구 감독은 팬의 영역이 아니었다. 전문가 집단인 프런트, 그리고 구단의 실소유주인 그룹 오너가 가장 큰 힘을 미쳤다. 구단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그룹 오너냐 아니면 프런트를 믿고 맡기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만약 야구단에 관심이 많고 직접 선택하길 원하는 오너가 있다 하더라도 프런트의 힘은 막강하다. 예를 들어 새 감독을 선임한다고 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가 있으면 최종 후보군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특정인물에 대한 오너의 애정이 각별하다면 흠집을 찾아내 보고할 수도 있다.
이게 기존의 프로야구 감독선임 과정이다. 사장과 단장 등 프런트는 감독후보를 추려 최종결재를 올리고 오너가 선택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팬 여론이 개입될 여지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팬들의 목소리가 감독 선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014년 10월 25일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날이다. 준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LG가 승리를 거두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지만 팬들의 이목은 KIA와 한화의 감독 소식에 쏠렸다. KIA는 불과 6일 전 재계약을 발표했던 선동렬 감독이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알려왔고, 한화는 김성근 감독을 3년 20억 원의 조건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선동렬 감독의 자진사퇴,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부임은 팬들이 만든 것이다. KIA는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선동렬 감독에게 2년 재계약을 안겼다. 재임기간 3년 내내 4강 실패, 그리고 2년 연속 8위를 거둔 선동렬 감독은 KIA 팬들에게 있어서 '무등산 폭격기' 가 아닌 실패한 감독이었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선동렬 감독은 구단을 통해 홈페이지에 각오를 밝히는 글을 게재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결국 선동렬 감독은 여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사퇴를 발표했다.
한화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게 된 과정도 극적이다. 당초 한화는 내부승격 쪽에 무게를 두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안은 그룹오너의 재가를 받지 못했다. 최근 6년 가운데 5번이나 최하위에 그쳤지만 열렬한 응원을 보낸 한화 팬들의 별명은 '보살', 그렇지만 이번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나찰'이었다.
한화 팬들역시 포털 실시간검색어 점령을 시도해 어느정도 효과를 봤다. 포털 서명운동을 통해 한화 구단에 김성근 감독 영입을 요구했는데 1만명에 가까운 서명인을 모았다. KIA팬이 그랬던 것처럼 한화팬도 김성근 감독 영입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한화 본사가 있는 종각으로 향했다.
과거 야구팬들이 물리력을 행사하고, 21세기 야구팬들은 키보드로 의견을 나눴다면 최근 야구팬들은 양공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구단은 팬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듣기 시작했다. 팬이 가장 먼저, 야구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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