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50대 중반의 영화사 김 모 대표는 요즘 숙면을 취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가 불면증에 시달린 건 한 중국 투자 회사와 한중 합작 영화를 만들기로 한 뒤부터다. 순제작비 20억 원 남짓의 작은 영화지만, 그래도 5년 만에 영화를 찍게 돼 지인들에게 조촐하게 한 턱도 쐈다.
하지만 겉으로 웃고 있는 그의 속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타들어가고 있다. 중국 투자사와 자신을 연결해준 에이전트로부터 얼마 전 미심쩍은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털어놓은 속내는 이렇다. 원래 20억 원 미만의 예산으로 영화를 찍기로 얘기가 끝났는데, 보름 전 불쑥 에이전트로부터 27억 원으로 촬영 예산서를 다시 작성해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원래 부산과 상하이에서 각각 절반씩 촬영하기로 한 로케이션 일정도 갑자기 틀어졌다. 3대7 분량으로 중국 촬영을 늘려야 투자가 집행될 것 같다는 통보에 가까운 이메일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크랭크 인을 불과 한 달도 안 남기고 예산 타령을 하는 속셈은 뻔했다. 김 대표의 머리를 스친 건 ‘또 뽀찌를 원하는 게로군’이었다.
사실 김 대표가 잠을 못 이루는 진짜 이유는 얼마 전 겪었던 일에 대한 불안함과 죄책감 때문이다. 자신이 개발한 시나리오가 두 달 전 중국 투자사로부터 오케이를 받았을 때 책정된 판권료는 5000만원이었다. 그런데 계약을 앞두고 에이전트가 “책을 1억에 팔아줄 테니 나머지 5000만원은 무자료로 처리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투자자와 자기 덕분에 시나리오가 팔렸으니 나머지 돈은 거마비 성격의 리베이트 비용으로 처리하자는 얘기였다.
“혹시 나중에 탈나지 않겠냐”는 김 대표의 걱정에 에이전트는 “형님, 대륙에선 원래 다 이렇게 한다. 중국 ‘쩐주’가 이런 리베이트도 없으면 미쳤다고 한국에 돈을 투자 하겠느냐”며 웃었다고 한다. 결국 김 대표는 세금 부담을 떠안으며 5000만원을 타인 명의의 계좌로 쪼갠 뒤 5만원권으로 인출해 에이전트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번엔 시나리오에 이어 예산서까지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달라는 걸 보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적중할 것 같아 한결 더 노심초사하게 된 것이다. 대륙의 ‘통 큰’ 제안에 답 메일을 보내야 하는 김 대표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된 배경이다.
리베이트를 뜻하는 은어 ‘뽀찌’ 비즈니스가 한국 영화계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자본의 한국 영화계 진출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일부 잘못된 관행 탓에 많은 영화인들이 공금 횡령과 배임의 덫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건 몇 년째 개점 휴업중인 중소 영화사의 경우 이런 제안이 불법, 탈법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롯데와 CJ로부터 거절당한 시나리오를 중국이 사주겠다는데 이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할 바보가 얼마나 있을까.
요즘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열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 제작사를 직접 접촉하는 중국 회사도 부쩍 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에이전트들에게 사기를 당한 회사일수록 이 같은 서울 상륙에 공을 들인다. 상하이에서 한국인 에이전트에게 ‘김수현 광고 출연을 타진해 달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제 직접 서울에 자기 사람을 보내 키이스트 관계자를 만나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 특유의 리베이트 관행이 적잖은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선 엄연히 탈세임에도 중국 입장에선 ‘뭐 그 정도 배려도 안 해주냐’며 째려볼 경우 이를 물리치기가 힘들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민호 김수현 같은 빅 스타 뿐 아니라 차세대 한류 연기자들도 중국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간혹 무리한 리베이트 요구 때문에 계약이 불발되는 사례도 종종 벌어진다. 괜히 몇 억 더 벌려다가 나중에 탈세 연예인으로 적발되면 이미지 훼손이 더 크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것이다.
최근 장근석 송혜교 전지현 등 한류 스타들의 잇따른 세무 조사도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한 브로커들 몇 명이 세무 당국에 적발되면서 불이 붙었다. 이 과정에서 한류 스타 덕분에 수백억 원을 번 한 에이전트가 강남에 빌딩을 샀는데 이 자금 형성 과정을 추적하던 세무당국에 꼬리가 잡힌 것이다. 이 남자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담당했던 연예인 리스트와 탈세 과정, 돈 세탁 수법을 상세하게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중국의 모든 자본이 탈법을 조장하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영수증 끊고, 깔끔하게 회계 처리하는 차이나머니가 훨씬 많지만 개중엔 ‘투자액 중 일부는 우리를 위해서도 써야 한다’며 리베이트 관행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여전한 게 사실이다. 과연 잠 못 자는 김 대표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영화를 안 하면 안 했지 이렇게는 못 하겠다. 모두 없던 일로 하자”며 중국 투자자를 난처하게 만들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어쩐지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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