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금주 개봉작 ‘나의 독재자’(이해준 감독)는 모처럼 연기 끝판왕 설경구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시대와 배역을 잘 못 만나 광인이 돼야 했던 한 무명 배우의 고독한 최후, 그리고 엄마 없이 키운 하나 뿐인 아들에게 괜찮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외로운 남자의 부성애를 극적으로 그려내며 ‘역시’라는 찬사를 끌어냈다.
돌이켜보면 설경구는 ‘공공의 적’ 시리즈를 계기로 대중에게 한 발 더 다가왔지만, 배우로서의 아우라는 조금씩 감가 상각됐다는 느낌이다. 민중의 곰팡이 강철중으로 나와 웃음과 부조리한 공권력을 조롱하며 흥행 배우가 됐지만, ‘소원’ 이전까지는 설경구만이 보여줄 수 있었던 진폭 넓은 뜨거운 연기와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독재자’가 반가웠던 건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함께 설경구의 깊이 있는 연기와 진면목을 재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설경구 혼자 오롯이 만들어낸 자력의 성과물일까. 상대 배우 박해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혼신의 힘을 죄다 쏟아 부을 수 있었을까. 연기란 배우들이 치열하게 감정을 주고받으며 화학작용이 일어야 비로소 몰입감이 생기는 법인데, 설경구가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해도 상대의 리액션과 호흡이 성에 차지 않았다면 외로운 섀도 복서가 돼야 했을지 모른다. 이래서 ‘나의 독재자’의 실질적 산파로 박해일이 주목받는지 모르겠다.

70대 노역을 위해 5시간 넘게 특수 분장을 했다는 예민한 중년남 설경구는 지금껏 찍은 영화 중 현장에서 “그거 시키지 마. 나 절대 못 해”라며 가장 엄살을 많이 부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한 재질 때문에 안면 모공이 모두 막혀 갑갑함을 넘어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테고, 표정과 감정 조절도 평소와 달라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오전 7시 촬영을 위해 그는 날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분장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다고 해도 특수 분장은 3시간부터 고비가 찾아온다. 땀이 차기 시작해 분장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설경구 노역 촬영은 분장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얼굴 클로즈업 위주로 카메라가 돌았다. 이렇게 되면 상대 배우 박해일은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촬영이 진행돼 감정이 뒤죽박죽 엉키게 된다. 배우들에게 멘붕이 올 때가 바로 이렇게 감정 배려를 받지 못 할 때다.
이뿐만 아니다. 촬영장 분위기가 설경구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자연히 박해일에게 신경 쓰는 스태프와 배려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삼복더위 속에서 모든 냉풍기가 설 배우에게 향해져 있어 박해일 쪽엔 부채밖에 없었을 때도 있었다. 비슷한 비중임에도 여러 번 찬밥이어야 했던 셈이다. 그날그날 촬영이 마무리될 때쯤에서야 연출부들 사이에서 ‘해일이 형도 신경 좀 쓰자’는 귓속말이 돌 정도였다.
이런 박해일이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촬영을 마친 건 그의 인격이 고매해서가 아니다. 전작 ‘은교’에서 지독한 분장을 경험해본 덕분이다. ‘은교’ 때는 10시간 넘게 특수 분장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분업과 숙련도가 붙어 시간이 절반이나 줄었다. 하지만 노역 분장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긴장감, 피부 트러블을 감내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박해일이 모든 촬영 스케줄과 감정 소모 단계를 설경구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은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선배라도 이 정도의 배려와 희생을 감수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해준 감독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데도 박해일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해일씨 아버지가 암 투병중인데 오래 전부터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성애 영화를 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자칫 설경구 영화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분량이나 임팩트를 따지기 보단 영화에 임하는 초심과 진정성을 중시했다는 얘기다. 혼자서 빛나는 별이 없듯이 ‘나의 독재자’와 설경구가 빛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 같은 박해일의 곧은 심지와 연기를 위한 집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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