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박영웅의 Early Bird] 찬란히 빛났던 그날의 무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스쿨밴드 활동을 했던 필자는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로 축제의 오프닝을 올렸다. 많은 스쿨밴드가 그랬던 것처럼. 마냥 음악이 좋았던 다섯 소년들에게 당시 신해철의 음악은 교과서이기도 했다. ‘절망에 관하여’ 등 넥스트의 많은 곡을 카피연주하며 멤버들끼리 합을 맞췄고, 그땐 다들 대단한 뮤지션이 된 마냥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건반 위에 손을 올리면 ‘그대에게’ 전주부터 손가락이 반응하는 걸 보니 그때의 기억이 꽤 강렬했나보다. 팝송에 열광하던 내게 신해철은 가요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나 다름없었다.
한때 음악인을 꿈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해철의 존재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발라드를 부르는 꽃미남 가수이자, 실험적인 음악을 끊임없이 탐구한 록밴드의 리더였고 메탈, 일렉트로니카 등 장르를 빈번하게 넘나든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또 삶의 의미를 되짚는 노랫말과 더불어 한국어 랩을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해철의 갑작스런 죽음은 유독 슬프게 다가온다. SNS에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추억을 쏟아내는걸 보면, 그는 모두에게 단순히 좋아했던 가수 그 이상의 의미였나보다. 그의 음악을 달고 살았던 30~40대에겐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안녕’의 영어 랩을 외우겠다며 한글로 가사를 받아적던, 극기훈련 촛불의식 때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를 틀고 여기저기서 눈물훔치던, 여자친구에게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던 기억. 내게도 그의 모든 노래는 사춘기였다.

대중음악사에서 90년대는 매우 특별한 시절이다. 댄스, 발라드, 록, 트로트 등 전 장르가 균형 있게 사랑을 받았고 20대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이 건강한 경쟁구도를 이뤘다. 어떤 뮤지션이 새로운 스타일과 장르의 음악을 내세우면 라이벌로 여겨지는 뮤지션이 이보다 한발 앞선 사운드의 음악을 들고 돌아왔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런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K팝의 자양분이 되었을 그 과정에서 신해철의 존재 또한 특별했다.
그는 음악적으로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무한궤도를 거쳐 발라드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뒤에도 넥스트란 실험적인 팀을 결성, 댄스 메탈 일렉트로니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실험을 쏟아냈다. 당시 비주류 장르로 분류되던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대중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한 곡이 히트하면 너도 나도 트렌드 좇기 바쁜 현 가요계와는 분명히 달랐던, 뮤지션 본연의 탐구정신. ‘욕망이 이끄는대로 나를 아끼며 살라’던 그의 말처럼이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철학적인 노랫말은 자의식을 반영하면서도 모두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메시지를 가슴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지표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와 가슴에 스며든 음악이었던 셈이다.
기자는 숱한 사건사고에 무덤덤해질 수 밖에 없는 야속한 직업이다. 하지만 이제와 가슴이 먹먹해질 수 밖에 없는 건 그가 온전히 내 감성을 지배한 사춘기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가장 기대하던 앨범은 재결성한 넥스트의 신보였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다시 인터뷰를 한다면 촌스럽게 팬심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정직하게 말해 내게 90년대, 그리고 신해철의 음악은 여전히 의심의 여지없는 애정의 대상이다.
오랜만에 꺼내본 넥스트의 1집 '홈’ 카세트 테이프 재킷 종이의 모서리가 닳아버린 걸 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음악을 들었던 시절들이 한꺼번에 소환된다. 순간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스친다. 고작 세간의 평가와 차트의 성적 따위에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음악의 진짜 본질에 소홀 했던건 아니었는지. 이제는 아끼지 않고 그의 음악을 실컷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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