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안에 명필름 전작 ‘우생순’이 보인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0.30 08: 00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대형마트 비정규직의 분투를 다룬 영화 ‘카트’(부지영 감독)는 얼개와 극적 서사 전개 방식에서 6년 전 명필름이 만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임순례 감독)을 연상케 한다. 휴먼 드라마라는 장르적 공통점 때문인지 지향점이 다름에도 묘한 기시감을 선사하는 장면과 설정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교집합은 충무로에서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여배우 멀티 캐스팅 영화라는 점이다. 남자 투톱이나 남자 멀티, 또는 남녀 주인공을 내세우는 영화가 90% 이상인데 비해 ‘우생순’과 ‘카트’는 여배우들이 떼로 나온다. 개봉 편수는 증가 추세지만 대기업 투자사들이 ‘안전빵’ 흥행 공식에만 기대다보니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가 획일화되고 있는데 ‘카트’와 ‘우생순’은 이런 흐름을 역주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올림픽 기간에만 반짝 관심을 받는 비인기 종목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뭉클한 감동을 그린 ‘우생순’에선 문소리 김정은이 모처럼 ‘여여 케미’를 선보이며 활약했고, 여기에 코믹함을 담당한 김지영 조은지 등이 가세하며 영화의 볼륨감을 키웠다. ‘카트’도 외벌이 가장인 염정아와 문정희가 극을 리드하고 김영애 황정민 천우희 등이 서브플롯으로 나와 힘을 보탰다. 정규직 전환을 앞둔 억척 계산원 염정아와 사측의 부당 해고에 맞서 노조 결성에 앞장서는 문정희의 호흡이 ‘카트’의 흥행 마중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건 두 여주인공 간에 흐르는 미묘한 갈등과 애증 코드 역시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우생순’에선 현역 시절 라이벌이던 문소리 김정은이 선수와 감독으로 재회하지만 여전히 서로 껄끄럽긴 마찬가지다. 실력은 더 뛰어나지만 소속팀 해체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문소리와 일본 프로팀 감독이 돼 고액 연봉을 받는 김정은의 대조적인 행보가 서로의 콤플렉스를 자극한다는 설정이었다.
 이런 미묘한 두 여자의 애증은 ‘카트’에도 발견된다. 남편과 벌인 녹즙기 사업 실패로 두 자녀의 양육을 홀로 책임지게 된 염정아에게 마트는 생계가 달린 밥벌이 공간이다. 이혼 후 혼자 아들을 키우는 문정희와 처지가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종종 심리적으로 부딪친다. 문정희 눈엔 정규직 사원 말에 매번 굽실거리는 염정아가 못 마땅하고, 염정아 눈엔 융통성 제로인 문정희의 냉랭한 태도가 좀처럼 이해가지 않는다.
 하지만 무능한 협회와 올림픽 무대에서 벌어지는 유럽의 편파 판정 부조리를 겪으며 문소리와 김정은이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듯 ‘카트’에서도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며 염정아 문정희의 연대도 단단해진다. 공교롭게 두 영화의 연출자가 모두 동성이어서 그럴까. 복잡 미묘한 여자들의 심리와 갈등, 때론 남자보다 끈끈한 우정과 화해가 잘 묘사됐다는 평가다.
또한 적대적이었다가 서서히 조력자가 되는 남자 캐릭터의 등장도 포개진다. ‘우생순’에선 한때 태릉선수촌 동료였지만 신임 대표팀 감독이 돼 아줌마 선수들을 구박하는 엄태웅이 밉상 캐릭터로 그려지다가 후반부 영화의 감동 지수를 끌어올리는 조력자로 변하게 된다. ‘카트’에선 김강우가 이 역할을 맡았다. 인사팀 정규직이지만 해고된 아줌마들을 외면할 수 없어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교훈이나 정해진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균형 있는 연출 태도도 닮았다.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문소리의 프리 스로우 장면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린 ‘우생순’처럼 ‘카트’도 열린 결말을 택했다. 검색 한 번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실제 사건의 결말을 답습하기 보단 판단을 관객에게 유보하며 비정규직 문제를 보다 깊게 곱씹어보게 만드는 깊이있는 연출 솜씨가 엿보였다.
무엇보다 ‘카트’와 ‘우생순’이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진 건 두 영화가 온기 넘치는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노동이라는 상업영화가 꺼리는 카테고리를 통해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건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묘하게 대칭을 이룬다. 좁게 보면 페미니즘, 넓게 보면 성장 영화에 속할 두 작품은 경험과 숙련도와 무관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고달프고 힘든 인생에서 우리가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살아야 할 지 잘 은유하고 있다. 하나만 더. '우생순'에서 실업팀 해체로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된 문소리가 마트 비정규직으로 일한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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