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사내 성희롱 등 보기만 해도 '하품나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지만 다큐에서는 진부한 소재가 돼버린 이야기가 의외의 드라마에서 꽃을 틔웠다.
웹툰 '미생'을 원작으로 한 tvN 동명드라마에서다. 원작에서는 한개의 에피소드로 지나간 워킹맘의 딜레마가 지난달 31일 방송에선 다른 스토리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단순한 '고발'의 수준을 넘어 쫀득한 스토리텔링으로 자리했다.
웹툰은 매회 다른 등장인물을 중심에 놓고 직장인들의 비애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데, 이를 겉핥기식으로 넘어갔다면 여성 문제 등은 사실 겉돌 수 있는 소재였다. 딱히 신선하지도 않은 주제. 그러나 기존 장그래(임시완 분)와 오과장(이성민 분)의 감정선을 지켜내면서 이와 연계된 스토리로 여성 등장인물들의 속까지 짚어낼 수 있는 건 리메이크를 맡은 작가와 연출진의 내공 덕분으로 보인다.

워킹맘의 고군분투를 그려낸 선차장(신은정 분)의 이야기는 그러한 고군분투를 언제가 겪어야 할지도 모를 알파걸 안영이(강소라 분)의 시선으로 그려져 울림을 더했다. 남자 선배로부터 이유도 없이 '뻣뻣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던 안영이가 눈물을 닦아내는 곳에서 아이를 픽업하는 문제로 남편과 다퉈야 하는 선차장과 마주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선차장이 안영이에게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일과 육아를 같이 하긴 어려워. 워킹맘은 어디서나 죄인이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죄인이야. 결혼하지마. 그게 속편해"라고 조언하는, 드라마 대사라기엔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말이 등장하는 씬과 임신한 몸으로 야근하다 쓰러진 사원을 두고 "또 임신이라니 이기적"이라고 씹는 남자 사원들을 보는 안영이의 씬은 시너지를 낸다.
이는 단순히 고발성 에피소드 삽입이 아닌 안영이의 내적 갈등으로 연결된다. 그는 자원팀이 고의로 영업3팀을 곤란에 빠뜨린 걸 알게 되지만 "이를 밝혔다간 여자라서 의리 없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한다.
안영이는 여느 판타지 드라마 주인공처럼 비현실적으로 용기있지도, 그렇다고 다큐 속 여자들처럼 마냥 피해자이지도 않았다. 이 지점은 안영이 캐릭터에 대한 리얼리티와 호감도를 모두 끌어올린다. 그는 "그게 무슨 성희롱이냐"며, 이 역시 드라마 대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대사에 맞서 "상대가 불쾌하면 성희롱"이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거나, 영업3팀의 누명을 벗겨줄 서류의 위치를 장그래에게 몰래 알려주는 정도로 최소한의 용기를 낸다.
선차장 역시 난데 없이 일을 포기한 채 아이를 택하지 않고(다른 드라마라면 그랬을 것이다), 바쁜 출근길 아이를 향해 한번 더 웃어주는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는데, 이는 원작에 있던 장면이지만 안영이의 스토리와 어우러져 더 뭉클한 순간을 선사한다.
앞으로도 '미생'은 직장인들의 다양한 딜레마를 다뤄낼 예정. 1일 방송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간 무시당하고 마는 직장인의 슬픔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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