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은 김일성 아닌, 늙은 설경구” [인터뷰]
OSEN 정유진 기자
발행 2014.11.08 11: 29

설경구가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22년간 자신을 김일성으로 믿으며 그 속에 굳게 갇혀 살아왔던 노인의 육중한 몸을 벗으니 어느새 담백하고 날쌘 배우의 본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화를 보고 어땠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내저으며 “내 영화를 편하게 잘 못 보는 사람이다. 오그라든다.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다”고 답하는 수줍은 모습에서 설경구란 배우의 인간적인 면모가 묻어 나왔다.
설경구가 배우 박해일과 함께 부자(父子) 연기를 펼치는 영화 ‘나는 독재자’는 남북정상회담 김일성 대역 배우로 뽑혔다가 20년이 지난 후에도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는 아버지 성근(설경구 분)과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미치기 직전인 아들 태식(박해일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설경구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김일성이라 믿는 태식의 아버지 성근 역을 맡았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던 1972년, 탈냉전이 진행되고 있던 1994년, 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만큼 설경구는 어린 아들을 키우는 젊은 가장에서 정신을 잃은 노인까지 한 인물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그려내야 했다. 언론시사회 등을 통해 나온 반응은 극찬 일색이었다. 무대 ‘울렁증’을 느끼는 무명 배우부터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는 미친 노인 연기, 9살 차 박해일을 향한 부성애 연기, 유려한 북한 사투리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 특히 박해일과의 연기 호흡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까다로운 배우가 아니에요. 배려심이 많고 그가 갖고 있는 해맑음이 있죠. ‘똘끼’ 같은 게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모습이 일상에서 보여요 개구지고 그래서 그 친구가 안 늙는 거 같기도 하고…. 예전과 비교해도 똑같은 얼굴을 갖고 있어요. 나한테는 문자도 ‘아버지 나 가고 있어요’라고 보내고. 그래서인지 ‘말이 돼?’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박해일 역시 언론시사회에서 설경구와 부자연기를 했던 것에 대해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아버지와 설경구의 몸집이나 품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연기가 갈수록 더 자연스러워진다며, 혹시 어떤 전환점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으니 “아니요. 나이가 먹는 거겠죠.”라고 짧게 답했다. 혹시 성근처럼 배역을 고를 때도 아이들에게 줄 영향을 고려하는지 묻자 왠지 셀 것 같은 이 배우에게서는 의외로 약한 대답이 돌아왔다.
“막 센 게 무섭긴 해요. 극악스러운 그런 건 못하겠어요. 약해진 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책(시나리오)들은 접근이 잘 안 되는 게 있어요.”
김일성 대역 배우 역을 위해 김일성의 영상을 살짝 참고하기도 했다. 설경구는 제작진이 편집해 준 영상을 보다가 순간, 섬뜩해 커튼을 훅 닫아 버렸던 웃지 못 할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배역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김일성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감독 역시 김일성과 다르게 표현될 것을 주문했다고.
“이해준 감독이 특수 분장을 하면서 절대 김일성처럼 만들면 안 된다고 얘기했대요. 실제로 감독이랑 이야기를 할 때도 ‘김일성이 되면 안 된다. 설경구가 늙은 얼굴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고요. 뭔가를 만드는 것보다 출발은 설경구로부터. 설경구가 늙었을 때 모습이 나와야지, 김일성의 모습을 만들어 붙이지 말아 달라는 거였죠. 처음에 ‘김일성 모습이 나오면 안 된다. 설경구가 출발점이 돼야한다’고 해서 그 말로 전체를 이해했어요. 어차피 나는 김일성을 알지도 못하고,”
영화 초반 주인공 성근은 연극 무대에서 배역 하나를 따내기 위해 포스터를 붙이고 허드렛일을 하며 꿈을 위해 달린다. 그러고 보면 이 연기파 배우도 연기를 시작할 시절, 성근 못지않게 열정적이었을 것 같았다. 잊지 못할 추억도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나는 숫기가 없었어요. 배우를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선배들한테 끌려서 1학년 때 여름방학이 끝나고 연극을 했죠. 그 때에 대해서는 경련밖에 생각이 안 나, 파르르 떨려요. 오른쪽 광대가 팍팍.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학생이었을 때 .정말 무서웠어요. 영화를 하면서도 대학교 선생님이 하자고 해서 연극에서 편지를 읽는 건데 앞에 관객들과 눈이 마주치는데 어휴, 확 일어나더라고요. ‘지하철 1호선’을 영화를 하다가 했는데 이창동 감독님이 와서 보시고는 ‘네가 이 연극을 다 망치고 있더라.’고 하셨어요. 연극은 무서워요.(웃음)”
성근이라는 캐릭터는 두 가지 지점을 갖고 있다. 배역에 비정상적으로 몰입해버린 배우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이 두 가지 중 설경구가 더 몰입했던 쪽은 아버지 쪽이었다.
“성근이를 하면서 그게 헷갈렸던 부분이에요. 안 빠져 나오느냐, 못 빠져 나오느냐. 나는 봤을 때 안 빠져나온 거에 70% 이상을 두고 싶어요. 아버지가 아들 눈을 못 봐요. 영화를 보면 절대 눈을 안 마주치죠, 마음 한구석에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정신 오락가락한 와중에도 있는 것 같다. 부모가 그래요. 최근에 어떤 글을 읽었는데 치매 할머니에 대한 글이었어요. 보셨나요?길 잃은 할머니에게 보자기가 있었는데 정신이 간 상태에서도 자기 해산한 딸윽 먹이려고 먹을 걸 싸가고 있었대요. 그게 부모에요. 아마 성근도 태식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과 의사소통에는 힘든 부분도 있었다. 이해준 감독이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편이 아니었던 데다 역할 자체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
“설명을 길게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신이나 커트에 대해서 얘기하다 감독님 눈을 보고 있으면 측은해져. 감독님이 늘 미안해하고 배우한테 말 보다 표정으로 얘기하시는 편이에요.(웃음) 어떤 날은 촬영 중에 중간에 독백하는 데서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눈물을 전 대사로 당겨 달래. 그런데 그게 내가 울고 싶어서 운거야? ‘그걸 어떻게 해. 감정이 계산이야?’라고 화를 낸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들어올 때는 속상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실패했던 연극을 생각하면 되나? 알았어. 해볼게’라고 광대 시절을 떠올리며 대사를 했죠.”
생각보다 참 순종적인 배우였다. 투덜거리면서도 끝내 감독의 뜻대로 결국엔 따랐다니.
“일단 한 번 개기죠. 그래도 결국엔 해요. 나는 그런 사람이이에요.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맞다고 하는 사람이요. 져준다기 보다는 감독이 나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잖아요. 수백 번, 수천 번. 전체를 생각했던 사람이라 그 사람이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늘 싫어하다가도 그 노트대로 가고 있더라고요.”
인터뷰가 끝날 때쯤, 설경구가 문자 하나를 받고는 웃었다. 근처에서 인터뷰를 하던 박해일이 문자를 보낸거였다. 설경구가 문자를 읽어줬다. ‘아버지. 오늘 삼청동 날씨가 좋네요.’ 설경구는 여전히 그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다며 “박해일에게는 ‘똘아이’같은 해맑음이 있다”고, 아버지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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