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라 불리던 사나이가 있다. 누구는 삼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별명만 듣고 지낸 이들은 그 이미지만 기억하고 산다. 광야를 바람같이 질주하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는 이상훈 코치(43)는 몇 가지 색깔이 더 있다. 매우 조심스럽고 예민한 사람이다. 몸과 행동이 가볍지 않다. 한 때 음악을 했던 그다. 그만한 감수성이 있다는 얘기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이 그에겐 가장 중요했고, 못지않게 합당한 명분과 환경도 챙겨야 했다.
최근 이상훈 코치는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몸 담고 있는 고양 원더스를 떠나야 하고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던 LG 팬들과 등져야 한다. 11월이 지나면 두산 베어스 코치로 간다(물론 아직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2004년 마지막으로 공들 던졌던 SK와이번스 투수 이후 꼭 10년만에 프로야구계에 복귀한다.

프로 직업인이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양 원더스는 11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운영하겠다는 해체결정이 나 있는 상태이고, 두산 코치 제안은 이미 1년 전부터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11월 말까지는 내 소임을 다하겠다”였다.

고양 원더스가 홈구장으로 쓰고 있는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이상훈 코치를 만났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행보와 배경이 궁금했다.
두산으로부터는 이미 1년전부터 영입 제의가 있었다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연락이 오기 시작한 건 지난 추석 무렵이었다. 이상훈 코치는 “작년 겨울 고양 원더스 제주 마무리 캠프 때 두산에서 코치 영입 의사를 타진하는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올 시즌 중에 들었다. 사실 나도 그 얘기는 건너건너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두산 관계자가 이상훈 코치에게 직접 전화를 건 것은 9월 중순이었다. 당시 고양 원더스는 시즌이 끝나고 팀 해체 소식을 전하기 직전이었다. “두산 관계자가 전화를 해서 혹시 LG측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없었는지 물었다. 그런 제의는 없었다고 했더니 ‘우리랑 해 볼 생각 있느냐’고 했다. 나는 ‘감독님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답을 했다.”
이후 고양 원더스 해체 발표가 났고 김성근 감독도 코칭스태프에게 “각자 좋은 자리 있는 지 알아 봐라. 다들 잘 됐으면 좋겠다”고 공지했다. 이 즈음 두산 김태룡 단장이 이상훈 코치에게 전화해 “LG쪽에 (영입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 했다. 우리랑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코치는 대답했다. “감사하다. 다만 11월 말까지는 원더스와 함께 하고 싶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확인 됐다. 이상훈 코치를 두산에서 탐내고 있다는 것을 김성근 감독이 가장 먼저 알고 있었고, 또 구체적으로 영입 논의가 오가고 있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상훈을 한화 코치로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김성근 감독의 마음 속에만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훈을 이토록 신중하게 만드는 배경은 무엇일까? LG 팬들이었다. 프로 진출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오늘날의 이상훈을 있게 한 구단이 LG이다. LG와 이상훈 사이에는 커다란 상징성이 얽혀있다.
이 코치는 “죄가 있다면 내가 LG를 나온 게 죄겠지. 일본과 미국을 돌며 선수생활을 할 때도 잠실 구장의 그 함성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오래 몸담았고 행복도, 슬픔도 아픔도 있었기에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불러 준 두산에 또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잡해져야 하는 지 모르겠다. 일개 코치 계약이 왜 이리 힘든 것인 지.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하니 두산에 미안하고, 두산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LG 얘기를 안 할 수 없으니 또 LG에 미안하다.”
어찌보면 답은 간단하다. 원더스는 해체 됐고, 그를 오라고 한 데는 두산밖에 없으니 그냥 두산으로 가면 된다. 그러나 이상훈을 기억하는 LG 팬들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었다.
현실적으로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지난 5일에는 두산이 일본 미야자키로 마무리 훈련을 떠났다. 코치가 마무리 훈련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김태형 감독에게 전화를 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간곡히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김태형 감독도 “충분히 이해한다. 11월 말까지만 잘 마무리하기 바란다”고 대답했다. 양측 모두 상황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에서 2년간 함께하면서 이상훈 코치는 ‘기다림의 미학’을 깨우치고 있었다. “코치 입장이 되니 가장 중요한 게 기다림이라는 걸 배웠다. 선수가 코치와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하고, 기량이 커가는 것을 기다려야 하고, 모든 게 기다림이더라. 인생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이 코치의 지도자 변신은 수년 전 헤어스타일에서 이미 시작됐다. 이 코치는 2012년 말 고양 원더스에 오기 전에 대치중학교와 배재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삼손 머리카락은 깨끗이 정리 됐다.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데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선수 시절 머리카락을 자른 게 1996년 딱 한번 있었다. 사실 그 때는 후회가 됐었는데 지금은 짧은 머리가 정말 좋다.”
선수시절 삼손 머리를 고집했던 이유도 팬들을 의식한 게 컸다.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 그리고 무시무시한 공을 던지며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에 팬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렀다. 상황도 바뀌었다. “코치가 돼서 마운드에 오를 때 바람을 가르며 뛰어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투수코치는 경기 흐름을 바꾸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데 그때 긴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간다고 생각해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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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원더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