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 ‘생활연기의 진수’, ‘착한 남자의 표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배우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착각이 들 만큼 자연스럽게 창만 캐릭터를 표현했고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착한 남자 창만을 통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이희준은 지난 11일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극본 김운경, 연출 임태우)에서 다세대 주택에 살면서 그 안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일까지 하나하나 나서서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착한 사나이 창만 역을 맡아 열연, 큰 감동을 선사했다.
창만은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고 성실, 근면, 정직 빼면 시체인 남자다. 항상 밝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청년으로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으로 가득한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그런 인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짜증나는 상황인데도 창만은 절대 화내는 일이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 유나(김옥빈 분)에게 모진 말을 듣고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유나를 달랬다. ‘저렇게 착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보여줬고 시청자들은 그런 창만을 통해 힐링했다.
“창만을 연기하면서 반성 많이 했어요. 유나에게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했는데도 창만이는 침묵으로 그 다음 행동을 하더라고요. 연기하다 보니 이희준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그 자리를 떠났을 텐데 창만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창만에 비하면 전 부족하죠. 작가님한테 감사해요. 그런 눈으로 세상을 8개월 동안 보게 해준 게 감사해요. 세상을 보는 눈이 뜨거워지고 따뜻해졌어요.”
사실 이희준은 그런 창만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소매치기인 유나를 변화시켜 ‘바닥 생활’을 청산하게 했다. 유나뿐만 아니라 미선(서유정 분), 한사장(이문식 분), 다영(신소율 분), 남수(강신효 분) 등의 인물들이 창만 덕에 변화했다.

“작가님한테 ‘창만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이해가 안된다’고 하소연했어요. 저도 이해심이 있는 사람인데 5~6회 찍을 때 창만을 이해 못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작가님이 아주 짧게 대답했어요. ‘창만은 희망이다’라고요. 대꾸하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죠.”
‘창만은 곧 희망’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창만 같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고 바라보고 주변사람들을 배려하고 위로하고 무엇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인물이었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연극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버스를 타고 명동예술극장에 가던 길이었죠. 당시 세월호 참사가 있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때였어요. 시청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아이와 엄마가 비를 맞으며 조문하기 위해 기다리더라고요.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기꾼들이 있고 나도 사기를 당했고 못된 사람들도 많은데 IMF 때 금 모으자고 하면 금 모으고 누가 슬픈 일을 당했다고 그렇게 줄을 서서 조의를 표하는 게 우리나라의 숨어있는 희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이 저한테 얘기한 희망이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연기하는 게 좀 더 편해지더라고요.”
이는 모두 이희준이 창만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올해로 데뷔 15년차를 맞은 이희준은 ‘유나의 거리’에서 깊은 내공을 보여줬다. 이희준은 6개월, 50회 동안 창만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창만에 빙의돼 연기를 펼쳤다.
“섬세한 이유가 잘 삐치고 소심해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인데 사람들이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왜 그렇게 얘기하지?’, ‘사람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생각을 해요. 말하다가 기침을 세 번 하면 ‘왜 하지?’라고 재미있게 생각하는 편이죠. 사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려고 해요.
우리네 이야기를 담은 ‘유나의 거리’는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드라마지만 극적인 장치, 화려한 대사 없이도 충분히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대신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주옥같은 대사와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가 있었다.

“김운경 작가님은 제가 만난 작가 중에 최고였어요. 작가님이 ‘유나의 거리’를 위해 노숙자나 우리 사회의 외로운 사람들을 인터뷰 했어요. 또 콜라텍도 다녔다고 하시더라고요. 할아버지들이 지갑에 비아그라 하나씩 넣고 다니는 건 알고 쓴 거 아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주옥같은 대사들이 탄생할 수 있었죠. 엔딩에서 유나에게 오리배로 청혼하는 건 정말 기발했어요. 제가 그날 2시간 밖에 못자고 대사를 외웠는데 언뜻 보면 단순히 오리배를 같이 타자는 건데 잘못 연기하면 가볍게 연기하고 유쾌하게 끝나는 정도일 것 같아 잠이 번쩍 깨더라고요. 진심으로 청혼의 마음을 담아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여운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연기했을 때 진심이 덜 담긴 듯해서 감독님한테 한 번만 더 하자고 했고 마음을 담아서 했어요.”
이희준은 50회, 6개월여 간의 시간 동안 좋은 작가, 감독, 훌륭한 스태프들과 일한 것에 대해 큰 감사함을 표했다. 생방송 촬영이었지만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섬세하게 한 신, 한 신 챙겨 준비했다.
“스태프들의 타성에 젖지 않은 창의적인 열정이 놀라웠어요. 대충 준비하지 않고 섬세하게 촬영을 진행한 것에 대해 감사해요. 카메라 감독님이 봉고차 뒤에 몸을 묶고 자전거 신을 열심히 찍는 모습을 보고 평생 열정적으로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정종준, 이문식, 조희봉, 안희상, 오나라, 김영웅 등 모든 배우들이 이희준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 됐다.
“배우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어요. 아쉬워서 제가 선후배들 다 모아서 저녁 6시에 대학로에서 밥을 먹고 제가 연기하고 있는 공연을 다 초대해서 보여드리고 술자리까지 하려고 해요. 3연타로 놀아 보려고 해요. 촬영하면서는 정종준 선배님이 오랜만에 드라마를 했는데 ‘유나의 거리’ 떄문에 3년 만에 술을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대학로에서 술도 사주시고 마지막에 함께 하고 싶어서 다 모았어요. 헤어짐이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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