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국제시장’이 윤제균 감독 영화의 결정판이라는 평을 듣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영화가 관객보다 절대 먼저 흥분하거나 호들갑 떨지 않는다는 점이다. 쓰리고 불쾌한 기억일수록 애써 망각하거나 적당히 윤색하게 마련인데 ‘국제시장’은 굴절된 부모 세대의 밑바닥 삶을 왜곡하지 않고 따스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2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1940년대생 한 남자의 선 굵은 이야기를 담아내다 보면 조급한 연출가일수록 의욕이 앞서게 된다. 그래서 종종 설득력 없는 코미디를 심어놓거나 주인공이 눈물을 쥐어짜며 ‘이래도 안 울 거냐’고 강요하기 마련인데 ‘국제시장’은 이 난코스를 절묘하게 피해갔다. 적어도 ‘마이웨이’ 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채 썬 듯 정확한 시간 계산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철저한 콘티 중심의 촬영, 현장에서 분, 초까지 기록하며 애초 시나리오에서 담으려 했던 액팅과 감정의 목표지점을 차곡차곡 쌓아나갔을 뿐, 일체 다른 양념을 가미하지 않은 초심을 지켜낸 결과일 듯싶다.

보통 이렇게 힘주는 영화의 러닝타임은 감독의 과욕 또는 불안감 때문에 2시간 20분을 넘기기 마련인데 ‘국제시장’은 놀랍게도 2시간 6분 만에 모든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압축에 관한한 대단한 자신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국제시장’이 올 겨울 랜드마크 작품이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둘째 이유는 영화가 어색하게 폼 잡지 않는다는데 있다. 어울리지 않는 색조 화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세안과 스킨을 이용한 피부 정돈에 더 시간과 정성을 들인 느낌이다. 메이크업의 성패는 사실 1차 단계인 스킨케어에서 판가름 나게 돼 있는데 윤제균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휴머니즘과 알맞은 코미디로 원숙하게 감동을 길어내는 솜씨를 보여준다. 자신의 부모 이름을 역할 명으로 정했을 땐 그 역시 각오가 남달랐을 것이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웃음 코드 덕분에 영화의 톤은 전반적으로 밝고 유쾌하다. 현재에서 과거로 전환되는 시퀀스도 익숙한 방식을 활용해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했다. 실감나는 흥남부두 피난신은 ‘해운대’ ‘7광구’ 같은 재난영화를 경험한 윤제균의 수업료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흥남철수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비슷한 크기의 화물선이 부산에서 3일간 정박할 때 이 배를 실사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으로 1950년 아비규환 흥남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울컥한 지점이 꽤 나오는데 가장 먼저 누선을 자극한 건 파독 광부 에피소드였다. 가족과 외화 벌이를 위해 독일 3D 산업에 뛰어든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고달픔과 처절함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게 죄스러울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지하 1000미터 막장에서 숯검정이 되고 갱도가 무너져 생사가 갈리는 장면은 짠함을 넘어 시대적 부채의식을 느끼게 해줄 만큼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는 ‘명량’에서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알란가’ ‘모르면 후레 자식들이제’라며 껄껄대는 대목과도 맥을 같이 하는 장면이었다. 부끄럽게도 당시 파독 간호사들의 주 업무가 시체 닦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덕수(황정민)가 여동생 끝순(김슬기)의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떠난 베트남에선 흥미로운 데자뷔가 등장한다. 흥남에서 탱크 대신 1만4000여명의 불쌍한 피난민을 선택하는 인도주의 장면이 비슷하게 재연되는데, 이 선택을 통해 덕수는 어릴 때 여동생 막순을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지만 아내 영자(김윤진)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만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결정적으로 터지는 건 후반부 이산가족 상봉신이다. 1983년 여름, KBS에서 주관한 이산가족 찾기는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은 전후 세대가 치러야 했던 한바탕 씻김굿이었다. 그동안 억눌렸던 한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이 무대에 덕수는 동생 막순을 찾기 위해 상경하고 가장 극적인 장면을 빚어낸다.
연기력에 대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황정민은 ‘국제시장’으로 대표작을 새로 쓰게 됐다. 이제 ‘신세계’의 정청,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은 잊어도 될 것 같은 호연이었다. 극단적인 인물이 아닌 평범한 가장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마치 빙의된 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내공과 자신감이 놀라울 뿐이었다.
김윤진도 황정민 영화의 보조 인물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달수와 함께 쓰리 톱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호소력과 진정성을 겸비한 연기를 보여줬다. 동병상련 처지인 덕수와 결혼하지만 생계 때문에 떨어져 사는 시간이 더 많은 외로운 아내와 엄마의 단절감을 이렇게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덕수가 갱도에 갇혔을 때 독일 관리자에게 구조하게 해달라고 악다구니를 치는 장면과 흐느끼며 병실 복도를 구슬프게 걸어가는 쓸쓸한 등판 연기는 압권이었다.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는 만큼 첫주 가르마만 잘 탄다면 1000만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 ‘해운대’로 1145만 관객을 동원한 윤제균이 국내 최초로 두 번째 1000만 감독이 될지 궁금하다. 12세 관람가로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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