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동거가 1년 만에 끝났다.
한화와 펠릭스 피에(29)가 결별했다. 한화는 지난 8일 피에와 재계약 협상 최종 결렬을 선언했다. 아울러 피에에 대해 임의탈퇴를 신청할 예정으로 향후 2년 동안 보류권을 유지할 의사를 밝혔다. 피에가 다른 팀에 뛰기 위해서는 한화 구단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한화는 다른 외국인 타자 외야수를 알아보기로 했고, 결국 '새드엔딩'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피에는 지난 1년 동안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외국인선수였다. 일단 성적이 좋았다. 119경기 타율 3할2푼6리 145안타 17홈런 92타점 9도루. 출루율(.373) 장타율(.524) OPS(.897) 득점권 타율(.315) 모두 수준급이었고, 중견수로서 폭넓은 외야 수비와 과감한 주루 플레이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린 외국인선수들도 있었는데도 더 많이 주목받은 것은 스타성 때문이었다. 피에는 외모부터 남다른 인상을 풍긴다.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행동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한화를 넘어 모든 어디를 가더라도 팬들은 그를 좋아했다. 한화에서의 좌충우돌 1년을 돌아본다.
▲ 독특한 인사법
피에는 시범경기에서 첫 타석 때마다 주심을 보는 심판과 상대 포수의 무릎을 방망이로 툭툭 건드리는 독특한 인사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피에는 메이저리그 때부터 해온 나름의 징크스이자 친근감의 표시였지만 이를 처음 겪은 심판들은 "미국과 한국은 문화가 다르다"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결국 매니저를 통해 주의를 받은 피에는 그 다음부터 손으로 헬멧을 잡는 식으로 인사법을 바꿔야 했다.
▲ 마운드 방문
4월16일 광주 KIA전에는 4회 무사 1·2루 위기에서 중견수 수비를 보던 중 갑자기 마운드 근처로 와 투수 케일럽 클레이에게 무언가를 말하다 경고 조치를 받았다. 피에는 "클레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아픈 것 아닌가 싶었다"며 "누군가 해야 할 행동이었다. 급한 마음에 마운드까지 갔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은 "피에가 왕이고, 임금이다. 혼자 다 하려고 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탐탁지 않아 했다.
▲ 데이비스식 거수경례
피에는 한국에 올 때부터 제이 데이비스와 많이 비교됐다. 같은 흑인의 왼손 외야수로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악동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특히 데이비스의 트레이드마크 거수경례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지난 4월20일 대전 LG전에서 5회 시즌 첫 마수걸이 홈런을 신고한 뒤 3루 베이스를 돌며 이종범 베이스코치에게 멋들어지게 거수경례했다. "손바닥이 보이면 안 된다"는 이종범 코치의 가르침으로 완벽한 경례 동작을 선보였다. 피에도 뒤늦게 데이비스 거수경례 동영상을 보고는 "정말 똑같다"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 판정 불만과 퇴장
다혈질의 피에는 심판들과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5월7일 잠실 LG전에서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볼 같은 스트라이크 판정에 심판이 보는 앞에서 배트를 내던지고 배팅 장갑도 거칠게 던졌다. 곧장 퇴장 조치된 피에는 이튿날 제재금 50만원과 엄중 경고를 부과 받았다. 8월14일 대전 롯데전에서도 피에는 스윙 판정에 두 팔을 들어 올려 불만스런 제스처를 취했지만 심판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 퇴장을 모면했다.
▲ 가슴 철렁 어지럼증
5월29일 대전 NC전에서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3회 우익선상 2루타를 치고 나간 피에는 2루 베이스에서 갑자기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 철렁하게 했다. 다행히 진단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피에는 "경기를 하다 어지럼증이 온 건 처음이었다. 나도 처음 당황했지만 별일 없어 다행이다"고 스스로도 놀랐다.
▲ 피에는 감독?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그날 경기를 앞두고 피에는 갑자기 감독석에 앉아 김응룡 감독을 흉내 낸 동작으로 큰 웃음을 선사했다. 피에가 아니라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 피에는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친한 사람들과 좋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다"고 답했다. 이후에도 피에는 김 감독의 의자에 앉아 인터뷰를 하곤 했다. 물론 김 감독 있을 때에는 하지 않았다.

▲ 내팽겨 친 글러브
6월15일 마산 NC전에서는 1회부터 한화 마운드가 7실점하며 무너지자 중견수 수비를 보던 중 글러브를 내팽겨 쳤다. 이전부터 피에는 동료들의 부진과 실수로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리낌 없이 불만을 표출하며 팀워크를 헤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난 지는 게 너무 싫다. 승부욕이 강해 나도 모르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자책했다. 주장 고동진은 "피에처럼 열정적인 외국인선수는 처음 본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고맙다"고 그의 기를 북돋아줬다.
▲ 코치와 언쟁
그러나 6월29일 포함 삼성전에서 결국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7회 피에가 수비에서 실수를 범하고 덕아웃에 들어온 뒤 이를 지적하는 강석천 수비코치와 언쟁을 벌인 것이다. 이에 김응룡 감독도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김 감독의 지시로 피에는 그날 경기 후 구단 버스에 오르지 못하고 따로 이동해야 했다. 피에는 눈물을 흘리며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격정을 토로했지만 구단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강석천 코치와 오해를 푼 피에는 "내게 최고 코치"라고 그를 치켜세웠다.
▲ 눈물의 선행
피에는 악동이지만 가슴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8월13일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루게릭병을 앓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야구 꿈나무 이영찬군의 집을 직접 방문해 장학금을 전한 것이다. 대전구장에서 캐치볼을 약속한 피에는 8월27일 대전 NC전에 이를 지켰다. 이군의 정성스런 편지에 피에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군 어머니는 "피에 선수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잊지 못할 것이다"고 고마워했다. 피에도 "나도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다"라고 감격했다. 조인성은 "피에의 선행을 보고 많이 느꼈다. 나부터 반성했다"며 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해 따로 기부금을 전했다.
▲ 대구구장 펜스
피에는 시즌 막판 수비를 나서지 못했다. 9월5일 대구 삼성전에서 수비 중 왼쪽 어깨를 부딪친 탓이었다. 이후 피에는 부상 투혼을 발휘했지만 제대로 된 송구가 나오지 않았다. 피에는 "충돌할 때 마치 바위에 부딪친 느낌이었다"고 했다. 한화 전정우 통역은 "피에가 아프다면 정말 아픈 것이다. 이곳저곳 안 좋은 부위가 많지만 어떻게든 경기에 뛰려 한다"고 증언했다. 피에의 부상을 계기로 대구구장은 계획에 없던 안전펜스로의 교체 작업을 올 겨울 진행하기로 했다.
▲ 예고없는 이별
피에와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이뤄졌다. 재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했고, 도미니카공화국까지 찾아간 한화 구단은 그의 무리한 요구에 난색을 표한 끝에 결렬을 선언했다. 100만 달러 이상에 다년계약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피에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시즌 막판 그는 "가족 같은 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년에도 한화에서 뛰고 싶다"고 희망했다. 하지만 프로는 비즈니스, 피에는 한화와 예고 없이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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