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고사한 이제훈, 누가 그의 치즈를 옮겼을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2.10 14: 44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드라마나 영화의 흥망성쇠를 비단 관객 동원이나 시청률로만 재단하는 건 매우 협소하고 편향된 접근법이라는데 동의한다. 불운하게 망했어도 얼마든지 걸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고, 아무리 흥했어도 불량식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혼이 깃든 작가주의나 고품격을 표방할 것이냐, 아니면 일단 팔리는 것부터 만들어 선보일 것이냐는 방송, 영화 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창작자들이 조석으로 겪는 해묵은 숙제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월등한 관객 동원력과 시청률에는 컨텐츠의 품질과 별개로 반드시 보편적 정서가 담겨있게 돼있다. 아무리 막장이라고 욕해도 고공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는 그게 상수도든 하수도든 어느 정도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시청자를 사로잡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제2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SBS 드라마 ‘비밀의 문’이 지난 9일 동시간대 꼴찌인 5.2%의 시청률로 초라하게 퇴장했다. 작년 3월 개봉작 ‘파파로티’에 이어 한석규 이제훈 조합이 다시 한 번 대중에게 외면당한 것이다.
 
꽈배기 같은 난해한 극 전개, 제작진만 궁금했던 맹의의 실체 등이 주요 패인으로 거론된다. 무엇보다 이제훈 입장에선 제대 후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더 큰 아쉬움으로 남을 듯싶다.
 
상황이 이렇자 방송가에선 이제훈이 눈 딱 감고 ‘미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애초 ‘미생’ 제작진이 장그래 역을 이제훈에게 가장 먼저 제안했고, 상당 기간 그에게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훈 측은 전역 후 컴백작을 tvN에서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나의 예상처럼 진도가 나가있던 SBS와 한석규를 파트너로 정했다.
 
이제훈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미생’ 측은 키핑 상태였던 제국의 아이들 임시완 카드를 꺼냈고 결과적으로 기대를 뛰어넘는 대박을 맛봤다. 20회로 기획된 ‘미생’은 케이블 방송의 한계를 비웃듯 7%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 중이며, 연장 방송이 논의됐을 만큼 ‘불판’ 드라마가 됐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주연 뿐 아니라 대리, 경리 등 조단역까지 주목받았고 막판 PPL 제의도 쏟아지고 있다.
 
이제훈의 선택이 뼈아픈 건 단지 ‘비밀의 문’의 시청률이 저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드라마 특성상 전 회 대본을 미리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시놉시스와 3~4회 확정 대본만 보고 출연을 결심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 한번 연기 합을 맞춰본 한석규에 대한 무한 신뢰, 그리고 그와 책임을 분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두 남자의 케미는 영화에 이어 기대를 밑돌았고, 시청률 부담에 쫓긴 작가는 매회 복잡하고 황당한 스토리를 이어가며 중심을 잡지 못 하고 갈팡질팡 했다. 급기야 사극이 가장 꺼린다는 역사 왜곡 논란에까지 휘말렸고, 이런 일련의 소동은 그나마 남아있던 시청자들마저 이탈시키고 말았다.
 
반면 ‘미생’은 어느 정도 넥타이 부대의 지지를 받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남녀노소 열광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단순한 직장생활의 애환, 고달픔을 뛰어넘어 인간관계와 처세,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같은 제법 묵직한 주제의식과 화두를 던지며 단박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미생’은 장그래와 안영이의 억지스런 러브라인과 회장님의 뒷목 잡는 돌발 행동, 선악 대립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무엇보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담백함을 살린 게 주효했다.
 
이제훈은 왜 ‘미생’을 거절했을까. 케이블 채널이라서 혹은 SBS와의 의리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 모바일 영화까지 나온 마당에 과연 이게 될까 싶은 의구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장그래로 분한 모습을 상상해보면 꽤 적역이겠다는 확신이 든다. 하지만 그는 사도세자를 택했고, 장그래는 주연 후보였던 임시완의 분신이 됐다.
 
결국 이제훈은 작품을 큰 틀에서 바라보는 통찰과 직관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고, 거꾸로 임시완은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을 가장 구체적으로 입증한 모범 사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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