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쪼개기] '미생' 신입-대리-차장, 3단계 직장 고민
OSEN 이혜린 기자
발행 2014.12.13 13: 12

경력이 쌓이고 요령이 늘면 직장 생활도 좀 편해질 법도 한데, 사실 그렇지가 않다. 내가 내공의 레벨을 높일 수록 시련도 레벨을 높여서, 매번 새롭게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들에 맞닥뜨린다. 그래서 힘들고 지치는 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거나, 오히려 더 높아진다.
지난 12일 방송된 tvN '미생'은 신입사원들과 대리급 사원들, 차장들의 고민을 두루 보여주며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의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대리와 차장의 사정을 들여다보니, 그동안 '미생'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책임져온 신입사원들의 처절한 고군분투는 차라리 귀엽게 보일 정도. 어디 하나 쉬운 사람이 없었다.

얄미운 상사와의 신경전, 거슬리는 동료의 승승장구 등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대리급이 되면, 진짜 그 경쟁의 성과가 만인 앞에 발표가 된다.
그 냉혹한 결과는 '누구는 비정규직이니까', '누구는 여자니까' 등의 태생적 한계 뒤로 숨기도 쉽지 않다. 지난 수년간 직장생활을 책임져온 자기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할 자기 '실력'이다. 주재원 근무를 놓고 동기들이 다같이 마음을 졸이지만 누군가는 쓴웃음을 지어야 하는 상황. 여기까지는 차라리 나은지도 모른다. 실패한 자에게는 '팀을 잘못 택해서 그렇다', '라인을 잘못 섰다' 등 자극적인 뒷담화들이 따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건 자신이 받아드는 가장 '객관적인' 성적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쓰다.
성대리(태인호 분)가 도덕적으로 올바른지는 차치하더라도, 한석률(변요한 분) 같이 매번 자신을 이기려드는 신입사원을 만난 것도, 강대리(오민석 분)가 할줄 아는 것 하나도 없으면서 자기 프로젝트만 하려드는 장백기(강하늘 분) 같은 신입사원을 만난 것도 그들에게는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다.  
대리급들이 뭉쳐서 술을 한잔하고 주사 있는 김대리(김대명 분)를 부축해 거리를 걷는 장면은,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함께 걷는 장면과 질감이 다르다. 아직은 묵묵히 삭힐 수 있는 신입의 고충과 달리, 대리급은 한번씩이라도 폭발시키지 않으면 힘든 무게다.
오차장(이성민 분)의 고민은 더했다. 위에선 최전무(이경영 분)가 속셈 빤히 보이는 나쁜 짓을 권하고, 밑에선 후배들이 혹시 자신 때문에 출세를 못한다고 느끼진 않는지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그래도 오차장은 나은 편이었다. 선차장(신은정 분)은 남편의 퇴사 권유에도 꿈쩍하지 않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잘 챙겨주고 정을 줬던 후배들이, 사실은 자신의 퇴사를 은근히 기대한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차장 자리가 비면 후배들이 '치고' 올라올 수 있으니까. 평생 함께 일하고 싶다며 알랑대던 녀석이 사실은 자신을 '언젠가 그만둘, 그래서 그 빈자리를 넘겨줄' 상사로 취급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어렵게 걸음을 떼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선차장이 다 내려놓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어렵게 경력을 이어왔지만 허무한 순간에 맞닥뜨리고 마는 중간급 직장인들의 마음까지 세게 흔들었다. 
'남자한테 좋은' 꿀이라는 말에 설탕물을 잔뜩 사온 신입사원을 향해 '순진하다'고 비웃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 '여전히 내가 순진한건가, 더 약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공간. 매번 '더 비정하고 독한' 무언가가 되도록 시험 받고, 또 시험 받는 공간.
신입도, 대리도, 차장도, 직급만큼의 고민을 떠안고 스스로 묻는다.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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