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TV] 맞아, '미생'은 다큐가 아니었어..현실vs판타지 갈림길
OSEN 이혜린 기자
발행 2014.12.14 08: 04

그동안 너무 '다큐'로 봤나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우리네 현실을 너무나 잘 담아낸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실제 서울역 앞 갈색 사각 빌딩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줄 알았던 거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이 실제라면 꿈도 못꿀, 그러나 드라마 주인공으로서는 너무나 멋있는 대사를 날릴 때, "아, 맞다. 드라마였지"라고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지난 13일 방송된 tvN '미생'은 영업3팀이 장그래(임시완 분)를 구제하기 위해 최전무(이경영 분)의 찜찜한 미션에 응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사실 팀의 계약직 사원을 정규직화 해주겠다고 찜찜한 거대 사업을 떠안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동안 오차장(이성민 분)이 자신 때문에 김대리(김대명 분)가 출세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깊은 고민에 빠지는 이야기와 이전의 계약직 사원 '은지씨' 때처럼 힘든 후배를 외면할 수 없는 태생적 성격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며 장그래를 위해 팀을 키워보자는 판단을 하는 데에 충실한 밑그림을 그려왔다.
장그래가 오차장을 위해 "사업을 그만둬달라"고 한 것도 장그래의 성격상 큰 무리는 없는 부분. '우리'라는 강한 연대감 속에서, 깊은 정을 느껴온 장그래로서는 자신 때문에 영업3팀이 위험에 빠지는 걸 두고볼 수만은 없었을 테다.
그러나 장그래가 상사인 오차장에게 "나를 구제해주겠다는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강력하게 어필하는 부분은 시청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신입사원 입장에선 사업을 진행하는 게 "오로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다,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상사에게 "하라, 마라"를 주문하는 건 일반 직장 문화에선 쉽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 주인공으로서는 오차장을 향한 의리가 빛나는 멋진 장면이었지만, 그동안 늘 주눅들어있고 힘겨워했던 장그래에게 잔뜩 이입했던 시청자들과의 거리감은 꽤 멀어져야 했다. 나와 같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느날 그가 슈퍼맨 망토를 두른 모습을 본 배신감이랄까.
오차장도 '너무' 멋있었다. 그는 '건방지게' 훈수를 두는 장그래에게 "네가 무슨 짐작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사생활과 일은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회사가 장난인 줄 알아?"라고 화를 냈다. 실은 본인이 제일 찜찜하면서, 장그래를 위해 최전무를 두둔하는 모습은 참으로 짠했다. 짠하고 멋진 상사일수록 현실성은 떨어진다.
물론 드라마가 100% 현실성을 담보해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므로 '미생'의 선택이 틀렸다고 볼 순 없다.
그동안 속도감 있는 전개로 호평받았던 이 드라마는 이번 회차에선 이렇게 장그래와 오차장의 갈등을 부각하고 이 사안과 전혀 관계 없는 안영이(강소라 분)-장백기(강하늘 분)의 미묘한 애정 라인을 진전, 다음주 진짜 결말을 위한 숨고르기에 돌입했다. 그래서 평소 방송보다는 루즈한 편이었다.
그러나 영업3팀의 운명에 대한 궁금증은 잔뜩 높여놨다. 오차장은 능구렁이 같은 최전무의 셈이 빤히 읽히면서도 기꺼이 속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 오차장의 내공만으로 그보다 몇 수 위인 최전무의 덫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이 모든 게 오차장의 편집증적 의심은 아닐 것인지, '미생'에는 클라이막스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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