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기차역이나 터미널 식당에서 만족스런 음식과 서비스를 기대하지 않는 건 식당 주인과 손님 모두 피차일반이다. 어차피 서로 뜨내기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밥을 먹으며 ‘왜 MSG를 많이 넣었냐’고 타박하는 건 지나가던 애완견이 비웃을 일이다.
명필름과 더불어 기획력 좋기로 유명한 영화사 비단길은 이런 점에서 사람들 줄 세우는 삼청동쯤에 위치한 도심 속 소문난 맛집 중 한 곳이다. 준비한 재료가 떨어지면 미련 없이 ‘오늘 장사 끝’을 외치며 셔터를 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가 중 하나다.
‘추격자’ ‘음란서생’ ‘늑대소년’ 등 비단길이 만들면 어딘지 새롭고 고급스럽다. 중요한 건 대중들의 기호를 적당히 반영하면서 영화의 품격과 가성비를 끌어올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의 총주방장 김수진 윤인범 대표의 놀라운 예술적 감각이자 상업적 직관일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거의 모든 작품을 신인 감독들과 협업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루기 쉬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요즘 신인 연출가들은 의외로 깐깐하고 과거에 비해 덜 타협적이라 오히려 연출료를 좀 더 책정하더라도 기성을 쓰는 게 맘 편하다고들 하는데, 비단길은 여전히 신인 웰컴을 고집하고 있다. ‘상의원’(이원석 감독) 역시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하는 초보인데 결론적으로 비단길의 이번 선택은 반은 맞았고, 반은 빗나갔다는 생각이다.
궁중 의상을 만드는 두 바느질쟁이의 경쟁과 갈등, 화해를 그린 ‘상의원’은 영화로 빚어내기 딱 좋은 이야기 얼개와 볼거리를 겸비했다. 묘한 신경전으로 불붙은 두 남자의 대립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이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내는 정반대 스타일의 화려한 복식은 쉼 없이 시각적 자극을 주며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매력적인 스토리와 신선한 볼거리가 흥행의 양대 축임을 상기해보면 비단길의 기획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상의원’의 드라마가 전작에 비해 유난히 헐겁고 아귀가 안 맞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30년간 임금과 중전의 의상을 만들어온 어침장 돌석(한석규)과 저잣거리에서 기생들 옷이나 만들다가 궁궐에 스카우트된 공진(고수)은 둘 다 천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왕의 총애를 받으며 면천하게 된 한석규의 기득권과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고수의 프리스타일이 서로 충돌하면서 내적 갈등이 심화된다.

그저 바느질과 내가 만든 옷을 입고 웃어주는 사람이 좋을 뿐인 공진은 예의와 법도, 격식을 따지는 돌석이 못 마땅하고, 돌석은 공진의 자유분방함과 파격이 정서적으로 마뜩잖다. 설상가상으로 임금과 중전이 공진의 창의력에 더 높은 점수와 관심을 보이자 돌석은 급기야 질투를 넘어선 살의를 느끼게 되고 어떻게든 공진을 파멸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게 된다. 문제는 이런 두 천재의 충돌 과정이 점층 구조로 쌓여야 제 맛일 텐데 ‘상의원’은 중반부터 필요 이상으로 무거워질 뿐 정작 둘의 감정을 고조시키지 못 한다.
충분한 양을 찍어놓고 편집 과정에서 일부분을 드러냈을 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드라마의 훼손이 ‘상의원’에서도 있었던 건 아닐까. 전동 재봉틀 부럽지 않게 경쾌하게 출발한 ‘상의원’ 그러나 중반부터 바느질이 한 땀 한 땀 느려지기 시작했고, 후반부 간신히 봉합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신인 감독 조련에 능한 두 셰프가 왜 이렇게 메뉴와 레시피 과정에 무심했을까 궁금해진 대목이었다.
이런 신인 감독의 의욕 과잉, 허점을 메워준 건 역시 배우들의 열연이었다. 한석규는 신분상승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후배에 대한 열등감, 두려움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을 매료시킨다. 공진이 만든 옷을 모조리 수거하고 불태울 때 보여준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승자이면서 패자인 페이소스가 고스란히 전달돼 많은 걸 느끼게 해준다.
첫 사극에 도전한 고수 역시 대체 불가한 연기를 통해 여전히 주목해야 할 배우임을 입증해낸다. 범접할 수 없는 중전의 옷을 만들며 그녀를 흠모하게 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임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저돌적인 모습은 공무도하가를 떠올리게 한다. 중전을 지키기 위해 누명을 쓴 채 최후 진술하는 장면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잔상을 만들어내며 콧등을 시큰거리게 했다.
이 영화로 첫 투자배급에 뛰어든 와우픽쳐스의 바람대로 손익분기점 300만 명을 모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연말 유일한 국산 사극 러브스토리라는 점에선 기대를 걸어볼 만하겠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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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원' 스틸,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