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원’ 유연석, 이제 막 톨게이트 통과한 ‘쾌속남아’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12.17 14: 46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체감 온도가 영하 17도로 떨어지자 불현 듯 90년대 대학가에서 떠돌던 우스개 한 토막이 스친다. 한 겨울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여자 친구를 대하는 각 대학 남학생들의 마인드와 태도를 빗댄 일종의 세태 풍자였다.
 눈보라 치는 날 여자가 손을 비비며 “저기요, 오늘 많이 춥죠?”라고 묻자 연세대 학생은 조용히 외투를 벗어주거나 장갑을 내밀어 여자를 감동시킨다. 이에 비해 숙기와 스킬이 부족한 고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여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람을 막아줄 뿐이다. 반면 군인 정신 투철한 육사생도는 “우리 같이 뛸래요”라고 말해 여자를 놀라게 하고, 서울대생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다고 한다. “그러게요. 저도 춥네요.”
 만약 사지선다 형 객관식 문항이라면 연대 남자의 반응이 정답일 텐데, 이 자상할 것 같은 연대 오빠의 이미지를 톡톡히 뽑아먹은 수혜자가 바로 유연석이란 생각이다. 작년 ‘응답하라 1994’에서 연대 야구부 에이스 칠봉으로 나와 어깨 깡패라는 닉네임을 얻은 그는 리얼리티 떨어지는 창백한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여기에 나정에게 다가가는 강남 대치동 매너와 수줍음까지 갖춰 단박에 팬덤을 형성했다.

‘늑대소년’ ‘건축학개론’에서 워낙 악역 연기를 잘 소화해 ‘원래 저런 기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던 그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미지 세탁이 좀 어렵겠다 싶었지만, 그는 ‘응사’로 보란 듯 이런 우려를 한 방에 기우로 바꿔놓았다. ‘올드보이’에서 출연료 50만원을 받았던 그는 이제 어딜 가든 환영받는 호감 이미지를 장착했고 토크프로 ‘택시’에 이어 ‘힐링캠프’까지 진출했다.
 10년간 먼지 자욱한 비포장도로에 익숙했던 그에게 영화 ‘제보자’는 국도 진입을 알렸고, 사극 ‘상의원’은 배우로서 고속도로에 진입했음을 상징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대외적으로 한석규 고수가 투톱이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유연석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리게 될 만큼 완전연소급 호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비록 골은 못 넣었지만 전후반 풀 타임동안 지치지 않고 그라운드를 폭넓게 쓰며 어시스트에 최선을 다한 성실한 미드필더를 보는 흐뭇함이랄까.
 ‘상의원’에서 유연석의 진가가 드러난 건 역설적으로 그가 극에서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실핏줄 터지도록 눈에 힘을 주거나, 팔 다리를 과도하게 쓰며 배역의 감정과 딜레마를 전달하려고 웅변하기 보단 미세한 눈동자 움직임과 옆얼굴만으로도 얼마든지 그가 맡은 왕의 내적 소용돌이가 감지됐다. 무수리에게 태어나 어렵게 오른 왕위를 지켜내기 위한 콤플렉스와 열등감, 거기서 비롯된 분노와 울분까지 충분히 객석에 전달됐다.
형에게 선택받은 여자를 중전으로 맞아야 했던 그는 요즘으로 치면 성적 자기 결정권조차 박탈당해야 했던 비운의 왕이다. 형수 같은 왕비에게 마음이 열릴 리 없던 그는 심리적 허기와 헛헛함을 궁녀들에게 보상받으며 쾌락과 허무함 사이를 반복, 고립을 자초한다. 유연석은 여린 것 같으면서 강단 있고, 마초 같으면서 갈대 같은 입체적이고 문제적인 인물을 다른 배우를 떠올리지 못 하도록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시사회에서 만난 유연석은 “영화에 누를 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겸손해했지만 한편으론 “과거보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이 생긴 건 배우로서 무척 즐거운 일인 것 같다”며 대중의 기대치를 뛰어넘겠다는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언제까지 고속도로를 질주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분간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일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정속 주행하며 좋은 연비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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