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채널이 많아진 요즘, 카메라 앞에서 입담과 빠른 두뇌 회전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쉽게 스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여기에 통찰력과 겸손을 겸비한다면 이름 앞에 ‘국민’이란 수식어까지 탑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순발력과 임기응변에 몰두하면서 동시에 통찰력과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학습되기 보단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영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국민 MC 유재석이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으로 사랑받는 건 바로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와 겸손을 갖추고 있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본다는 건 나만 잘해서 튀어보겠다는 생각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다. 어쩌면 김태호 보다 더 PD다운 깊이와 시야를 갖고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골고루 방송 분량을 안배해주고 좀 뒤쳐진다 싶은 게스트에게 수시로 눈을 맞추며 ‘괜찮아 기다려. 내가 갈게’라고 사인을 보내는 것쯤은 이제 눈썰미 있는 시청자라면 알 만한 수준이 됐다. 게스트가 양껏 못 웃기면 ‘준비 안 해왔다’며 타박하고 발언 기회를 거둬가는 전투형 MC들이 많은 요즘, 유재석은 더 각광받는다.
그런 그가 KBS에 이어 MBC 연예대상에서 잇따라 그랑프리를 거머쥔 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나는 남자다’가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 했지만 10년째 ‘해피투게더’를 지키고 있고, 한해 수백억의 광고 수입을 벌어들이는 효자 프로 ‘무한도전’의 키 맨인 그를 계산기 두드리는데 선수인 방송사가 외면할 리 없다. 대상 수상은 ‘올해도 수고했고, 내년도 서로 잘해봅시다’라는 암묵적인 러브 샷인 셈이다.
MBC 연예대상 수상 소감 중 ‘역시 유느님이다’ 싶은 지점이 둘 있었다. 하나는 MBC ‘코미디에 빠지다’ 후배들에 대한 소신 발언이었다. KBS ‘개그콘서트’에 밀려 존재감이 바닥인 MBC 코미디언들은 이날 시상식에 얼굴을 비치지 못 했다. 전속 개그맨들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자축 성격의 예능인 시상식에 정작 초대받지 못 한 진짜 '코미디'가 벌어진 것이다. 수익과 스테이션 이미지 제고 중 어느 것 하나 기여한 게 없다고 판단한 방송사의 결정이었다.
이게 마음에 걸린 유재석은 “지금 솔직히 마음이 아프다. 예능의 뿌리는 코미디라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후배와 동료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 했다. 부디 내년엔 이 방식을 재고해주셨으면 좋겠다”며 건의 형식을 빌려 안타까움과 못마땅함을 내비쳤다. 유명하지 않고 기여도가 적다고 해도 한해를 닫는 자사 시상식에 참석조차 못 한 후배들의 낙담한 얼굴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만약 유재석이 처음부터 잘 나가는 스타였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선후배를 밟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사람이 승자로 대접받는 정글의 세계에서 이런 마인드는 자칫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깎이 스타라도 수상소감에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 잘 나가야 하기 때문에 힘 센 누군가에게 접대성 멘트를 날리기 바쁘지 않았을까.
못 나가는 한솥밥 후배들을 위해 이렇게 소신 발언할 수 있었던 건 유재석이라는 사람의 고운 결과 전체를 보듬을 줄 아는 부감샷 마인드가 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시청자 분들이 언제까지 허락해줄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제 인생을 걸고’ 같은 표현이 정치적인 수사나 괜한 허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그가 여태껏 보여준 진심과 낮은 자세 덕분일 것이다.
그의 진정성이 또 한 번 돋보인 건 불미스런 일로 자숙죽인 노홍철, 길에 대한 언급에서였다. ‘그 녀석’ ‘그 전 녀석’으로 지칭해 웃음을 자아낸 그는 “꼭 두 친구가 직접 시청자들에게 사과드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말썽 빚은 후배들을 꾸짖는 동시에 컴백하면 따스하게 받아달라는 형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방송 전날까지 게스트의 프로필과 출연작, 최근 인터뷰까지 뒤져보고 암기하는 열정, 녹화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집에 돌아가 끙끙 앓는다는 프로 방송인. 가벼운 재주만 믿고 날로 먹으려다가 반짝 인기를 뒤로 하고 쓸쓸히 퇴장하는 예능인들이 즐비한 요즘, 유재석의 진가가 한결 빛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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