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배우 오달수(47)가 천만 고지를 목전에 둔 불판 영화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으로 누적 관객 1억명을 돌파해 화제다. 지난 2002년 ‘해적 디스코 왕 되다’의 단역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쉬지 않고 60여 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며 쌓은 금자탑이다.
오달수의 1억 모객은 그가 흥행을 책임지는 주연이 아닌 조단역 배우이고, 유독 천만 영화와 인연이 깊고, 최동훈 박찬욱 김지운 같은 흥행 감독 콜에 자주 응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만약 송강호 최민식 같은 타이틀 롤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작품에 겹치기 출연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만약 그랬더라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슬럼프와 인기 부침 탓에 이렇게 승승장구하지 못 했을 테다.
그럼에도 오달수의 1억 관객 돌파가 놀랍고 존경스러운 건 배우로 쌓은 그의 신뢰 자산 역시 훌륭하기 때문이다. 신뢰 자산이란 인맥과 노하우, 본업에서 쌓은 업력 등을 뭉뚱그린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화폐로 통한다. 회사에서 경쟁사를 따돌리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사표 내고 창업할 때 이 신뢰 자산이 빛을 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신뢰 자산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 두 번 화폐로 교환되는 특성 때문에 함부로 안주머니 속의 신뢰 자산을 활용하거나 자랑해선 안 된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소중한 인맥과 노하우를 오로지 회사를 위해 모두 사용했다가 퇴직 후 고독해지는 건 바로 이런 속성 때문이다. 어떻게든 잉여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해 자본은 피고용인들의 노동력 뿐 아니라 이 신뢰 자산에도 군침을 흘리게 마련이다.
오달수 같은 조연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흔한 오류는 바로 이미지 소진이다. 조연이 뜨려면 보통 코믹하거나 악역을 실감나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배우의 가치가 급속도로 감각상각 되게 돼 있다. 설상가상으로 곶감 빼먹듯 배우의 이미지를 작품에 녹여 내는 제작진 역시 신선한 마스크나 가성비 높은 대체제를 귀신같이 찾아내 기성 배우들을 외롭게 만든다.
코믹하면서 어딘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오달수가 여전히 신물 나지 않고 자신의 상품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굉장히 많은 가면을 갖고 있는 탁월한 배우이거나 영리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작품에서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 소비해주면서 여전히 보여줄 게 많다는 자신감을 갖는 건 범인이 흉내 낼 수 있는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조연 배우들이 결정적으로 삐끗하게 되는 타이밍이 바로 몸값을 높이며 주인공 욕심을 낼 때이기도 한데, 이 점에서도 오달수는 신공에 가까운 재능을 보여준다. ‘구타유발자들’ ‘페스티발’ 같은 저예산 영화에선 주연으로 나서지만, 50억이 넘는 상업 영화에선 절대 주연 욕심을 내지 않는다. 개런티도 합리적인 선에서 정하고 늘 ‘네고’가 가능하도록 열어놓는다.
오달수는 송강호 황정민 김명민 등 검증된 주연들과 거의 대동소이한 투톱으로 나올지언정 항상 마이크와 조명을 주인공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해왔다. 괜히 주연 욕심냈다가 흥행 실패를 겪고 섭외가 끊기며 고난의 행군 길에 올라야 했던 숱한 조연들의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그가 단순히 배우가 아니라 대학로에서 극단을 운영하며 체득한 제작자 마인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끝으로 오달수가 부럽고 대단한 건 연기라는 본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굉장히 높다는 사실이다. 12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평균 4편의 영화에 참여했다는 건 골프나 여행 보다 촬영 자체를 즐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면서 박수를 받고 돈까지 번다는 것, 심지어 너무 바빠 그 돈을 쓸 시간조차 빠듯하다는 건 분명 축복받은 삶이다.
오달수와 단순 비교하는 건 균형이 맞지 않지만, 빼어난 조건과 재주를 갖췄음에도 활동이 뜸한 ‘가뭄’ 배우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의아함을 갖게 된다. ‘아저씨’ 이후 4년간 공백중인 원빈을 비롯해 ‘하울링’(12) 이후 차기작 소식이 없는 이나영, ‘심야의 FM’(10) ‘감기’(13) 이후 극장에서 더 자주 만나고 싶은 수애 같은 배우들이 그렇다.
당장 마음에 꽂히는 상업 영화가 없다면 오달수처럼 독립, 저예산 영화로 눈을 돌려 마이너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건 어떨까. 아마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기 보단 그들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게 훨씬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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