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하정우의 재능 발휘, 이 정도면 반칙 아닌가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1.11 08: 1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작년 여름 ‘허삼관’의 촬영지 전남 순천에서 접한 제작비 관련 소문은 흉흉했다. 아직 반환점도 못 돌았는데 제작비가 벌써 3~4억 오버됐다는 얘기였다. 속으로 ‘대세 하정우도 별수 없군. 감독의 기본인 예산을 못 지키다니. 그 역시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겠군’이라며 신은 예외 없이 공평하다고 위안 삼았다.
 그로부터 반년 후. 완성된 ‘허삼관’을 보며 그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순제가 얼마나 넘쳤는지는 다음 문제일 뿐, 이 만큼 완성도 높은 영화를 연출하고 보란 듯 주연까지 해낸 그가 대견해 보였기 때문이다. 배우의 감독 도전을 그다지 곱게 보지 않던 사람 중 하나로서 이제 선입견을 수정해야 될 때라는 반성이 들 정도로 ‘허삼관’은 잘 빠진 범작 이상이다.
묵직한 중국 원작 소설을 1차 손질한 하정우 각본의 둔갑술 덕분이겠지만 ‘허삼관’은 상업영화의 미덕인 오락성을 끝까지 잃지 않으면서 감동과 메시지를 탑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과잉 캐릭터와 불필요한 플롯을 모두 걷어낸 덕분에 러닝타임 123분이 마치 12분 3초로 느껴질 만큼 충분히 웃겼고, 변곡점을 지나 후반부 감정선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볼륨 조절도 탁월했다.

영화는 동양인의 DNA에 내재된 순혈주의를 웃음 포인트로 활용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 삼관(하정우)은 물량 공세와 장인어른 공략으로 공주 제일의 처자 옥란(하지원)을 아내로 맞는 행운남이다. 그러나 세 아들을 둔 가장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에게 장남 일락(남다름)이 하필 눈엣가시 하소용(민무제)의 친자로 밝혀지며 첫 시련이 찾아든다. ‘우리 복덩이’로 불리던 일락 역시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아저씨로 불러야 하는 황당함과 혼란에 휘말린다.
호칭 개악과 외식 따돌림 등으로 정서적 만신창이가 돼가는 일락은 위독해진 친부 하소용의 회복 기원 굿판에 동원되며 최고조의 위기를 맞는다. 진심을 담아 ‘아버지 돌아오세요’를 복창해야 하지만 겁먹은 일락은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때마침 창밖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던 삼관과 눈이 마주치며 명장면이 빚어진다.
11년간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남의 핏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격분하기 보단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소심하게 복수하는 ‘종달새’ 삼관 역의 하정우는 희로애락을 마치 잘게 채 썬 듯한 정교한 연기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알고 보면 대사량이 적음에도 불구, 어떤 전작 보다 다양한 감정 기복과 묵직한 감동,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건 그가 유독 디테일에 강한 배우이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가령 슬픔의 강도를 1에서 10으로 구분한 뒤 각 신마다 5, 8 정도로 자유자재로 오가는 진폭의 높낮이가 놀라웠다. 만두를 사달라는 일락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절하고, 자기가 첫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아내를 대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모습에선 위기감 보단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누구보다 자식과 아내를 아끼는 속정 깊은 남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웃음과 감동이 질서 정연하게 교차하는 ‘허삼관’의 키워드와 핵심 정서는 다름 아닌 피와 처절함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피를 팔아야 하는 가난한 아버지와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락을 내치고 이락, 삼락만 싸고도는 삼관의 ‘웃픈’ 현실이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입양 보내기로 한 일락이 뇌염에 걸려 쓰러지자 그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에선 피 보다 농도 짙은 부정을 느끼게 된다.
더 이상 동네에서 피를 팔 수 없게 된 삼관이 아들 수술비를 위해 타 지역으로 가 동냥하듯 피를 뽑는 장면에선 눈시울이 가장 데워진다. 주사 바늘 때문에 시퍼렇게 부은 팔뚝과 초점 잃고 퀭해진 가엾은 눈의 삼관은 하정우 외의 다른 배우를 떠올릴 수 없는 높은 싱크로였다. 매혈을 강요당하지 않을 뿐 대한민국 가장의 고달픔과 삼관의 그것이 다르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중국 소설에 뿌리를 뒀을 뿐,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투영한 작품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허삼관’이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절반은 일락을 연기한 남다름이란 13세 소년 배우의 공일 것이다. ‘군도’에서 강동원의 아역으로 눈도장을 찍은 남다름은 감히 천부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다채로운 표정과 섬세함으로 영화를 살렸다. 삼관에게 만두를 못 얻어먹자 한밤중 친부를 찾아가 ‘한번만 만두를 사주시면 다신 귀찮게 안 하겠다’며 아비의 애정을 구걸할 땐 과연 저런 감정을 다 알고 연기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 만큼 역할과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삼관에게 어떻게든 버림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그렇다고 친부에게 편입될 수도 없는 가혹한 딜레마를 이렇게 실감나고 그럴 듯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건 하정우의 족집게 연출과 아역 배우의 순수함이 최상의 시너지를 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의 흐름을 좌우할 굵직한 플롯을 담당하진 않았지만 하지원도 안정된 톤 앤 매너로 실망을 주지 않는다.
다만, 축지법을 써야 할 만큼 바쁜 감독이 차기작 ‘암살’ 촬영으로 후반작업 일정에 차질을 빚고, 1960년대 서울에 고층 건물이 나오는 등 다소 엉성한 CG는 옥에 티다. 또 하나. 공주가 배경임에도 충청도 사투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역시 ‘준비 기간 단축을 위해서’라고 넘어가기엔 좀 프로답지 않았다. 작년 ‘해무’로 최악의 여름을 보내야 했던 NEW의 회심작이다. 12세 이상 관람가로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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