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같은 고아원 출신 넝마주이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는 새벽이슬을 피할 수 있는 판잣집마저 철거되자 ‘은행이나 털자’며 세상을 저주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하수구 형제인 둘은 따지러 간 철거 용역 형님들에게 오히려 스카우트 돼 얼떨결에 상경, 야당 전당대회장을 깽판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이날 난생처음 짜릿한 손맛을 봤지만 둘은 도피 과정에서 헤어지게 되며 3년간 소식이 끊긴다.
이후 종대는 세탁소를 차린 전직 중간보스 길수(정진영)의 양아들이 돼 낮밤 이중생활을 하고, 용기는 명동파 2인자까지 오르며 욕망의 노예가 된다. 마침 군사정권은 강남을 거점 개발하며 정치 자금을 조성, 정권 재창출을 꾀하고 이 과정에서 정치 깡패 하수인이 된 종대와 용기는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3년은 둘을 야수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돈과 달콤한 권력, 향락을 맛 본 두 남자는 땅과 돈에 집착하며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강남 개발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자 국회의원과 건달, 복부인 등이 일제히 빨대를 꽂고 한몫 챙기겠다며 아가리를 벌릴 무렵, 이에 휘말린 종대와 용기 역시 목숨을 건 최악의 고비를 맞게 된다.

‘강남 1970’은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에 이어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 중 마지막을 장식할 느와르다. 세상에 착근하지 못 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위태로운 청춘과 폭력이 결합됐을 때 빚어지는 비극이 셋을 관통하는 기본 정서. 감독은 강남 개발의 추악한 음모와 불온함을 통해 돈이 상전이 된 천민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한편, 몸부림치는 청춘의 처절함을 그리며 비장미를 구현하려 했지만, 135분에 이를 담기엔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압축과 절제가 필요했다.
일단 아쉬웠던 서사와 플롯부터. 무엇보다 종대와 용기의 끈끈한 형제애 구축이 부실공사처럼 허술했다. 한겨울 땀을 내거나 백열등을 껴안고 자야 할 만큼 냉골에서 동고동락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둘의 피보다 진한 형제애가 형식적으로 스치듯 그려지다 보니 헤어짐과 재회가 전혀 운명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다시 만난 종대와 용기의 미묘한 갈등과 동상이몽, 균열이 점층적으로 쌓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극적 갈등, 해소로 활용되지 못 했다.
입체적이어야 할 종대 캐릭터도 다소 모호하게 그려져 아쉬웠다. 양아버지 몰래 건달 생활을 하는 종대의 고민과 딜레마가 전혀 와 닿지 않았고, 특히 여동생의 혼인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황이다 보니 이해는 되지만 가슴으로 공감하긴 어려웠다. 여기에 이복 여동생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순전히 오빠로서 돕고 싶은 건지도 명확하지 않아 감정 이입을 방해했다.
한때 충무로의 이야기꾼으로 명성이 높았던 유하 감독이 왜 갈수록 서사에 더 치밀하고 순도를 높이지 못 했는지 아쉽다. ‘강남 1970’이 두 거리 전작을 뛰어넘었다고 보기 어려운 건 필요 이상으로 영화가 잔인해서가 아니라 바로 설득력 떨어지는 설계도 때문이다. 적어도 앞선 두 영화에선 주인공의 딜레마가 명확하고 주변 인물과의 갈등 구도도 적당해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너무 뻔하고 쉽게 읽혔다.
‘찌라시’에서 보복 당해 한쪽 다리를 다친 정진영이 이번에도 다리를 절뚝이고, 비 오는 날 벽을 보고 돌아누운 주인공이 독백하듯 뭔가를 고백하는 장면은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기시감 있는 신이었다. 왕가위 영화의 엔딩이 연상된 마지막 터널 신에선 비둘기가 등장할까 봐 가슴을 졸여야 했을 정도였다.
드라마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상황을 빨리 매듭짓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곳곳에서 등장한 총도 좀 느닷없었다. 군부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면 할 말이 없지만 주인공이 놈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건달이 상대파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에선 맥이 좀 풀렸다. 감독의 특기인 유혈 액션 신은 예상대로 잔인하고 소름 돋는다. 손도끼와 각목, 삽도 모자라 70년대 강남의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곡괭이와 낫까지 등장해 스크린을 원없이 붉게 물들인다. ‘어떤 영화든 액션은 드라마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감독의 신념이 얼마나 관객의 동의를 얻을지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두 주연 배우는 기대 이상의 케미를 보여줬다. 김래원은 감독의 절제 디렉션 덕분인지 화를 내고 악다구니를 쓸 때마다 지적돼온 전형적인 연기 패턴에서 벗어나 강약 조절을 통해 호연을 펼쳤다. 도박판에서 운 좋게 딴 돈을 지키려면 얼른 일어나는 게 상책이지만 어디 사람 욕심이 그런가. 초심자의 행운을 과신한 들개 같은 남자 용기의 욕망과 파멸을 리얼하게 표현해냈다.
사실상 첫 주연작인 이민호는 어느 각도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마스크와 긴 팔다리 액션으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넝마주이 꽃거지로 분장해도 감출 수 없는 뛰어난 이목구비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극복 대상이다. 드라마 보다 스크린에 최적화된 외모라는 점에서 딕션과 디테일을 좀 더 가다듬는다면 원빈 조인성을 필적할 배우가 될 것 같다.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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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