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와 하지원을 비롯해 조진웅 김성균 이경영 성동일 정만식 장광 주진모 김영애 윤은혜.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허삼관'의 출연한 배우들이다. 캐릭터에 비해 배우들이 너무 화려하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그 가운데 신선한 마스크로 눈길을 끌며 존재감을 발휘하는 이가 있다. 극중 허옥란(하지원)의 옛 남자인 하소용 역을 맡은 민무제다.

하소용은 멋스럽게 기른 콧수염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중저음 목소리로 귀 기울이게 만드는 인물이다. 이국적인 외양의 그가 가운을 입고 홀로 거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조연배우인가 싶지만, 그는 늦깎이 신인배우다. 포털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도 이렇다할 정보가 나오지 않는 이유다. 영화 '허삼관'은 그의 첫 영화다.

독특한 이름만큼 이력도 특이하다. 그는 '허삼관'의 주연 겸 연출인 하정우의 1년 선배로, 중앙대 연극영화과 96학번이다. 졸업공연 '카르멘' 당시 하정우와 함께 주인공을 맡을 만큼 유망주였다. 재즈무용단에서 2년 정도 활동했고, 중앙대 재학 중엔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졸업공연 후엔 프로젝트 연극팀 '아리 코리아'를 꾸려 유럽 각지를 돌며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스위스에서 이태리로 넘어가는 야간열차에서였다. 그는 가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정대로라면 팀원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가야 했다. 그는 홀로 이태리 로마에 남았다. 친인척도 없는 외로운 도시에서 가이드를 하며 돈을 모았다. 나중엔 쇼핑센터도 개업했다. 지난 해 2월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무려 12년이 걸렸다.
"몇 년 전 한국에서 하정우 감독님을 수소문해 만났어요. 올 때마다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죠. 타지이지만 10년 이상 살다보니 매너리즘이 왔어요. 동생의 유학비용을 댈만큼 생활도 안정됐고요. 배우를 다시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정우가) 오디션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 와서 보니 그것이 '허삼관'이었고, 좋은 배역까지 맡아 개봉까지 하게 됐어요."
하소용은 허삼관 가족에게 긴장감을 주는 인물이다. 허옥란이 결혼 전 교제하던 남자이자 일락(남다름)의 친아버지다. 원작에선 허삼관 보다 어린 나이에 기계 공장 직원으로 설정돼 있다. 민무제를 만나 하소용은 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됐다. 영화에선 밀수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민무제의 실제 삶과도 맞닿아 있다. 하소용은 허옥란이 결혼한 후 부유한 집안의 송씨(전혜진)를 만나 두 딸을 낳는다.
민무제는 하소용에 대해 "모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만두를 사달라는 친아들 일락(남다름)을 외면하는 매몰찬 면모 때문이다. 1960년대에 외제차를 끌고 다닐 만큼 부유한 인물이지만 "아내 눈치를 봐야하고, 친아들의 등장 자체가 매우 귀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좀 더 악역으로 그리고 싶었지만 하정우는 "생긴 것부터 강하니까 좀 더 나른해도 된다"고 말했단다.
배우들과의 호흡은 좋았다. 아내 송씨 역의 전혜진은 캐스팅이 정해진 후 민무제에게 전화를 걸어 "낮술 한잔 하시죠"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영화 현장이 아직 어색한 민무제을 전혜진은 "카메라의 낯설음이나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 말고 같이 잘해보자"고 다독였다. 실제 전혜진의 남편인 이선균이 촬영지를 찾아 두 사람을 응원하기도 했다.
남다름은 새해에 '하소용 아버지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줬단다. 그는 남다름과 함께 한 굿 장면을 가장 고됐던 촬영 장면으로 꼽았다. 하소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설정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흔들의자였던 터라 그의 몸이 자꾸 내려갔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이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군분투했다.
그에게 '허삼관' 촬영 현장은 "남들이 말하길 다시는 만나지 못할 최고의 촬영 환경"이었다. 감독 겸 배우이자 학교 후배인 하정우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한국을 떠난 사이 학교에선 재적을 당했고, 하정우, 현빈 등 후배들은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12년은 돌아온 시간이 아닌, 내공을 쌓은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힘든 상황이라면, 당연히 도움을 드리는 게 맞지 않나요? 실제로 도움이 된 것 같아 감사해요. 지금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것도 상(賞)이라고, 복이라고 생각해요. 좀 더 어렸을 때 연기를 했다면 날것이었겠죠. 내실은 부족한 속 빈 강정 같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겪어왔던 시련들을 표출할 수 있는 결을 쌓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부족하고 배워야 하지만요."
그는 '허삼관'에 이어 단역으로 영화 '남과 여'에 출연하는 등 차기작 찾기에 나섰다.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매력적이고 개성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있을 테고, 보여드릴 게 많습니다. 미혼이고, 아직 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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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