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국제시장’이 23일 1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감독의 전작 ‘해운대’ 기록을 뛰어넘었다. 개봉 전부터 예기치 않은 색깔 논란과 기대를 밑돈 예매율 때문에 흥행 전망이 불투명했지만, 우직한 컨텐츠의 힘으로 천만 클럽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영화 비전공자 윤제균 감독이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거머쥐자 충무로에선 ‘무지하게 쇠복 좋은 감독’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 데뷔하기가 로스쿨 졸업만큼이나 힘들고, 한 작품만 삐끗해도 차기작 연출 기회를 보장받기 어려운 척박한 정글에서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제작, 연출했으니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런데 금전운을 뜻하는 쇠복이란 말에는 실력과 재능에 비해 운이 상당히 작용했다는 뉘앙스가 포함돼 있다. 두 영화 모두 천만까지 갈 게 아니었는데 손님 많이 드는 시즌에 텐트폴 영화로 낙점됐고, 대진운까지 따랐으며 무엇보다 CJ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 아니냐는 ‘복통 논리’가 숨어있다.
웬만한 시나리오로는 CJ의 깐깐한 투자 심사 테이블인 GLC를 통과하기 어렵고, 하다못해 피드 백 빨리 주는 투자팀 직원 만나기도 천재일우인데 윤제균은 이런 점에서 CJ로부터 굉장한 특혜를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게 사실이다. 윤제균이 이끄는 JK필름이 CJ와 퍼스트룩 옵션 계약을 체결하며 매달 일정액의 경상비를 지원받는 것 역시 다른 영화사의 부러움과 질투 대상인 건 자명하다.
그렇다면 윤제균 감독은 CJ와 늘 호형호제하며 언제나 허니문 모드인 걸까. 별 이해관계 없이 윤제균과 CJ의 관계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둘 사이를 “볼 때마다 아슬아슬한 사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윤제균이 언제나 뜨뜻한 아랫목을 차지하는 귀한 손님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서로 보일러를 켜고 끄고를 반복하며 냉랭한 신경전을 펼칠 때가 많다는 목격담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횡행하던 정체불명의 마케팅비 합산과 제작사에 불리하게 적용되는 정산 과정, 제작사를 상대로 이자 놀이한다는 지적까지 받았던 연리 7%의 금융비용도 JK필름을 한숨짓게 했다. ‘1번가의 기적’이 흥행했을 당시에도 CJ는 기대 이상의 수익을 챙겼지만, 다른 영화 적자를 메우기 위해 윤제균과 제작사는 입맛만 다셔야 했다.
윤제균 감독을 오래 지켜본 한 투자사 임원은 “윤제균의 오늘날 성공은 외부 요인 보단 정직과 치열한 자기 검열에서 찾는 게 빠르다”고 말했다. 투자사를 돈 대주는 회사가 아닌 수평적인 사업 파트너로 대하고 누구보다 귀를 열어놓는다는 얘기였다. 영화는 결국 감독 예술인데 윤제균은 공동 창작물이라 여기기 때문에 다른 감독들과 비교할 때 많은 차별점과 합리성이 생긴다고도 했다.
국내 제작사 중 자비를 들여 모니터 요원을 활용해 시나리오와 편집본 리뷰를 하는 곳은 JK필름이 유일하다. 투자사 정도 돼야 이런 시스템을 갖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제균은 오래 전부터 자체적으로 수 백 명의 일반인 모니터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도 모니터 요원들에게 5점 만점 기준 4점을 넘지 못 하면 미련 없이 파쇄기를 돌린다.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는데 뭐 하러 만드냐는 심플한 논리인 것이다.
사실 JK필름의 높은 흥행 타율의 비결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판단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사업을 벌일 땐 확장하더라도, 아니다 싶은 확신이 들면 과감히 접을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가 또 다른 성공 요인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사는 지금까지 들인 비용과 시간을 아까워하며 몇 년째 같은 프로젝트에 목을 맨다. 한물 간 내용과 트렌드가 바뀐 줄도 모르고 그저 매몰 비용에 갇혀 사업을 그르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해운대’ 촬영 즈음만 해도 JK필름에는 스무 명 가까운 작가와 감독이 계약돼 사무실이 북적였다. 한 해 크랭크 인 하는 라인업이 서 너 편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 중 3분의 2는 모두 개발이 중단되거나 백지화됐다. 당장 수억 원의 손실을 확정해야 했지만 부실한 아이템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간 그 피해액이 수십억, 수백억이 될 수 있는 만큼 눈물을 머금고 발을 뺀 것이다. 이런 손실 때문에 JK필름은 한때 자신들의 공간에 인테리어 회사를 전전세 놓는 방식으로 임대료를 아껴야 했다.
윤제균이 가속 페달을 밟으려 할 때마다 옆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길영민 대표도 JK필름의 성장 동력이다. 고교 동창인 둘은 성격도, 성장 환경도 판이하지만 이런 상극점이 사업할 땐 상호 보완 작용하면서 시너지를 낸다. 감성적인 윤제균이 편집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면 옆에서 ‘정신 차려라’며 사정없이 죽비를 내려치는 이가 바로 길영민 대표다. ‘두 사람 곧 헤어지겠다’ 싶을 만큼 서로 냉정한 비판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지만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국제시장’의 최종 시나리오엔 덕수가 영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숨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길 대표와 두 주연배우는 ‘늙은 할배 죽여서 뭐할 건데’라며 윤제균을 설득했고, 결국 감독은 결말을 고쳤다. 웬만해선 타협하기 어려운 엔딩이었지만 ‘천재 하나 보다 바보 셋이 더 똑똑하다’고 믿는 윤제균이기에 가능했다.
개인적으로 윤제균에게 금전운이 있다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쇠복만 따른다고 평가하기엔 그의 치밀함과 정성, 영화에 대한 진심이 다소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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