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LA(미국 캘리포니아주), 박승현 특파원]메이저리그 구단별로 베스트&워스트를 연재하고 있는 CBS SPORTS가 지난 3일(이하 한국시간)에는 LA 다저스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베스트와 워스트에 대해 다뤘다.
▲베스트팀:1953년
1953년의 브루클린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규시즌은 지금까지 프랜차이즈 최고 승률인 105승 49패로 마쳤다. 페넌트레이스에서 내셔널리그 2위였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13.0 경기차로 앞섰다.

이 시즌에 다저스는 경기당 득점이 6.2점이었다. 포수 로이 캄파넬라, 중견수 듀크 스나이더가 홈런 83개를 합작했다. 캄파넬라는 이 시즌에서 자신의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34세였던 재키 로빈슨은 좌익수와 1루수로 뛰면서 .329/.425/.502의 공격 기록을 남겼다. 길 허지스가 31홈런, 칼 퓨리요의 장타율은 .580이었다. 공격력은 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였다.
▲워스트팀 : 1905년
당시 찰리 에베츠 구단주와 네드 핸런 감독의 불편한 조합이 큰 이유이기는 했지만 이 해 다저스는 바닥을 쳤다. 48승 104패로 시즌을 마쳤다. 팀 득-실점 차이가 300점이 넘었고 페넌트레이스 1위였던 뉴욕 자이언츠에 56.5경기 뒤졌다. 시즌 종료 후 핸런 감독은 해고 됐다.
이 일은 다저스가 1904년부터 1014년까지 11년 연속 승률 5할을 달성하지 못하는 와중에 일어났고 다저스라는 이름 역시 이 때 널리 알려지게 했다.
▲LA시대 베스트팀:1963년
99승을 거두면서 내셔널리그에서 10팀 중 7팀이 5할 이상을 거둔 가운데 리그 승률 1위에 올랐다. 머리 윌스가 타율 .302 도루 40개를 기록했다. 외야수 토미 데이비스와 프랭크 하워드가 OPS+ 142, 150을 각각 기록했다.
투수 샌디 쿠펙스는 311이닝을 던지면서 25승 5패, 평균자책점 1.88을 기록했다. 쿠펙스는 MVP와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돈 드라이스데일은 315.1이닝을 던지면서 ERA+ 114였다. 구원투수 론 페라노스키는 129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1.67이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정규시즌 104승을 거뒀던 뉴욕 양키스에 4-0 승리를 거뒀다.
▲LA 시대 워스트팀 : 1992년
이 해에 99패들 당했다. 20세기 들어 최다 패전이다. 다저스는 1992년에 548점을 득점했다. 브렛 버틀러만이 유일하게 한 시즌을 레귤러 선수로 보냈다. 주전 3루수 데이브 한센은 .214/.286/.299에 머물렀고 호세 오퍼맨은 유격수로 1,300이닝을 소화했다. 에릭 데이비스와 대릴 스트로베리가 있었지만 부상으로 몇 경기 나서지 못했다.
▲베스트 트레이드 : 데이지 밴스
1921년 당시 로빈스(다저스는 이 때 로빈스였다)는 마이너리그 뉴올리온즈 펠리칸스에서 밴스를 데려왔다. 포수 행크 디베리를 영입하기 위해 이른바 끼워 넣기로 데려온 선수였다.
밴스는 이전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뉴욕 양키스에서 메이저리그 경험이 있던 강속구 투수였지만 27세가 될 때까지 메이저리그 투구 회수가 겨우 33이닝에 불과했다.
하지만 팔꿈치 수술에서 회복 된 후 31세에 시작한 로빈스 생활에서 화려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187승 129패의 성적을 남겼다. ERA+가 130이었다. MVP에도 올랐고 7년 연속 내셔널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55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워스트 트레이드 : 페드로 마르티네스
1993년 젊은 마르티네스는 115이닝을 소화하면서 ERA+147, 탈삼진 127개를 기록하는 등 유망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 다저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2루수 더닐노 데쉴즈와 1: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이 트레이드를 결정한 프레드 클레어 단장은 다저스의 단장으로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지만 이 트레이드만큼은 최악이었다.
▲베스트 신인지명 : 마이크 피아자
1988년 드래프트 62라운드 전체 1,390번째 순서로 다저스는 피아자를 뽑았다. 피아자는 이후 12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되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격형 포수로 성장했다.
▲워스트 신인지명 : 빌 베니
피아자를 62라운드에서 지명했던 1988년 다저스는 1라운드에서 전체 5번째 지명권을 갖고 있었다. 다저스는 칼 스테이트LA 출신의 우완 투수 베니를 지명했다. 하지만 제구력 난조로 인해 한 번도 메이저리그에 서지 못했다. 마이너리그에서 515.2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 넷 543개를 허용했고 평균자책점이 5.45였다.
당시 드래프트에서 베니 보다 나중에 지명 된 선수 중에는 짐 애보트, 로빈 벤추라, 티노 마르티네스, 알렉스 페르난데스, 브라이언 조단 등이 있었다. 대런 올리버, 마키스 그리솜이 3라운드에서 지명 된 드래프트였다.
▲워스트 팀명: 브라이지그룸스(BRIDEGROOMS)
1888년부터 1898년까지 브루클린 브라이지그룸스로 불렸다. 이어 브루클린 그룸스가 됐다가 다시 브루클린 브라이지 그룸스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몇 명의 선수들이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신랑이라는 이름이 붙었었다고 한다. 브라이지그룸스가 쓰이지 않았다면 허리띠를 의미하는 커머번드가 그 다음 후보였다니 그래도 신랑이 더 나은 것도 같다.
▲베스트 신인투수: 1981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파업으로 단축시즌을 보내야 했던 1981년, 당시 20세에 불과했던 발렌수엘라는 13승 7패 평균자책점 2.48로 자신의 신인 시즌을 마쳤다. 192.2이닝으로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탈삼진, 완투 완봉에서 리그 1위였다.
▲베스트 파이널 시즌 : 샌디 쿠펙스
1966년 30세였던 쿠펙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323이닝을 던졌다. 27경기에서 완투했고 27승 9패를 기록하면서 평균자책점 1.73으로 메이저리그 최고의 평균자책점을 보였다. 탈삼진 317개로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세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월드시리즈가 종료 된 후 쿠펙스는 팔꿈치 부상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토미 존 수술이 없었다. 당시에는)
▲베스트 결정 : 재키 로빈슨과 계약
1947년 4월 당시 니그로 리그에서 뛰던 로빈슨과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의 장벽을 허물었다. 28세에 메이저리그 경력을 시작했지만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활약하면서 .311/.409/.474의 개인 통산 기록을 남겼다. 홈런은 137개였다.
▲워스트 난투극: 후안 마리챌 VS 존 로세보로
1965년 8월 23일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원정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당시에도 페넌트레이스 선두다툼으로 긴장감이 넘치는 경기였다.
3회에 샌프란시스코 에이스 후안 마리챌이 다저스의 머리 윌스, 론 페어리 두 타자의 등을 맞혔다. 이어 마리챌이 타석에 등장했을 때 다저스 포수 존 로세보로는 마운드에 있던 샌디 쿠펙스에게 마리챌을 맞히라는 사인을 냈다. 하지만 타자를 맞히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았던 쿠펙스는 제대로 마리챌을 맞히지 못했다.
쿠펙스의 볼을 포구한 뒤 로세보로는 다시 투수에게 볼을 돌려주면서 팽개치다시피 했다. 결국 쿠펙스도 어쩔 수 없이 타석에 있던 마리챌의 머리를 향해 볼을 던졌고 격분한 마리챌은 배트를 휘두르면서 마운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양팀 선수 모두가 달려 나오는 난투극이 벌어졌고 결국 마리챌은 당초 목표했던 쿠펙스가 아닌 로세보로의 머리를 자신의 배트로 갈기고 말았다. 이 때문에 로세보로는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 교체 돼야 했다. 그나마 심각한 중상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마리챌은 이 사건으로 9일간 출장정지와 2,0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물론 둘은 나중에 화해했고 2002년 로세보로가 사망했을 당시 마리챌이 장례식에 참석, 추모사를 하기도 했다.
▲베스트 끝내기 – 커크 깁슨
오클랜드 어슬래틱스와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3-4로 뒤진 9회 2사 1루에서 대타로 등장한 깁슨은 경기 마무리를 위해 9회 등판한 데니스 애커슬리로부터 끝내기 우월 2점 홈런을 빼앗았다. 다저스는 기세를 몰아 오클랜드를 4승 1패로 누르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nangap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