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한국시간) 2박3일 일정으로 SK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미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의 히스토릭 다저타운을 방문했던 박찬호(42)는 한 선수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야심한 저녁이었고 평소에 안면도 별로 없었던 선수였기에 놀라움은 더했다. 박찬호의 방문을 두드린 선수는 바로 서진용(23)이었다.
대선배의 방문을 두드리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것도 단순한 인사가 아닌, 면담 요청이었다. 박찬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놀랐던 기색을 감추고 방문을 활짝 열어 서진용을 반갑게 맞이했다. 초긴장 상태였던 서진용도 박찬호의 이런 환대에 마음을 다스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서진용은 박찬호 앞에서 최근의 부담감과 앞으로의 막연한 불안감을 털어놨다.
서진용은 올해 SK 마운드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우완 파이어볼러다. 2011년 신인지명회의에서 SK의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지명 당시 투수로 전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전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150㎞의 공을 쉽게 던지는 싱싱한 어깨가 주목받았다. 상무에 입대한 후에는 SK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지난해 퓨처스리그 39경기에서 4승2패2세이브12홀드 평균자책점 3.76을 기록하며 기대치를 키웠다. 38⅓이닝에서 45개의 삼진을 잡았다.

이런 서진용의 제대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단순히 팬들 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 및 구단 관계자들의 기대도 크다. 차세대 마무리감으로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당장 마무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올해 불펜에서 일익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치는 꽤 현실적이다. 그런데 정작 이를 받아들이는 서진용은 부담감이 있었다. 서진용은 전지훈련을 출발하기 전 “언론이나 팬들이 기대를 많이 하신다. 솔직히 부담감이 크다”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박찬호에 면담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부분의 연장선상이었다.
서진용은 “상무에서 야구를 할 때는 큰 심적인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SK에 복귀해 전지훈련을 치르다보니 이겨야 할 경쟁자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공을 던지다 갑자기 제구가 흔들려 이상한 공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영영 자신감을 잃어 그저 그런 2군 투수로 전락할까 두렵다”라면서 “운이 좋아 1군에 합류하더라도 중요한 경기에서 엉뚱한 공을 던지면 어떡하나. 연습경기에서 가끔 폭투를 던질 때 주위에서 나를 너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젊은 투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감과 패기가 떨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서진용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은 박찬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한 진심어린 조언을 이어나갔다. “마운드에 서 있을 때는 부정적인 결과를 미리 예측하지 마라. 설사 네가 잘못해서 경기가 어려워지더라도 그 다음 행동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적절한 절차를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라고 말을 시작한 박찬호는 후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어 박찬호는 “항상 잘 던지는 상상만 했을 경우에는 나쁜 결과가 있을 때 당황스럽고 주위 시선이 두렵고, 때로는 빨리 도망가고만 싶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도 상상하고 대비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라면서 “무엇이 두려운가. 차라리 공을 그냥 백네트 상단으로 던져버려도 상관없다. 있지도 않은 결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고 조언했다. 이런 박찬호의 이야기를 들은 서진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점을 고쳐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박찬호 또한 신인 시절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가 안 잡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조언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미국에서 숱한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의식과 끊임없는 심적 수련을 통해 결국 메이저리그라는 큰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박찬호로서는 이날의 서진용이 자신의 20대 초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진용도 비슷한 길을 밟을 수 있을까. 베로비치에서 이뤄진 야밤의 면담이 그 단초가 되기를 박찬호는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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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