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는 참 특이한 드라마다. 어떤 특별한 소재를 가지고도 결국엔 남자 둘, 여자 둘이 얽힌 로맨스로 끝나고는 하는 흔한 한국형 드라마 공식을 완전히 비껴나가 있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대를 이어져 되풀이되는 음모와 반격, ‘밤심부름꾼’이라는 주인공의 독특한 직업까지 평범한 게 하나도 없었던 이 작품은 막을 올릴 때까지 오롯이 예정됐던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이 특별한 작품 안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존재는 스타 기자이자, 작은 조카 곰(?) 두 마리를 돌보는 키다리 삼촌 김문호(유지태 분)였다. 사실 한국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미남에 ‘어깨깡패’로도 불릴 만큼 잘생긴 배우가 이렇게 끝까지 키다리 삼촌으로만 활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김문호는 마지막 순간, 과거 연인이었던 강민재(우희진 분)과 재결합 한 것을 빼면 러브라인을 두 조카에게 양보한 채 과거 사건을 파헤치는 데 몰입해 왔다.
‘힐러’는 정치나 사회 정의 같은 건 그저 재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살던 청춘들이 부모세대가 남겨놓은 세상과 맞싸우는 내용을 그린 작품. 유지태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해 왔다. 그는 자신들의 형-누나 세대가 저지른 과오에 고통스러워하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조카 세대를 지켜주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그는 권력과 욕망에 눈이 멀어 친구를 배신하고, 모든 악행에 동참해 온 형 김문호(박상원 분)를 향해 분노와 아픔을 동시에 표현했다. 자신을 부모처럼 길러 온 형과 맞설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눈물짓거나, 부모와 떨어져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영신(박민영 분)을 향해서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는 다정한 김문호의 캐릭터는 그에게 ‘키-플레이어’로서의 존재감을 부여했다.
더불어 자신의 배역에 몰입한 유지태의 집중력은 공공연히 알려져 왔다. 스타 기자라는 배역에 충실하기 위해 손석희나 이상호 등 이름을 알린 언론인들을 참고해, 현실감 있는 기자를 표현하려 노력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뿐만 아니라 유지태는 ‘힐러’ 기자간담회에서 “영신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내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영신이 가진 아픔과 문식, 명희의 드라마들에 연민이 느껴졌다. 컨트롤이 안됐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박민영의 밝은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며 배역에 푹 빠져있는 진짜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유지태는 극 중 직업인 기자 역을 냉철하고도 실감나게 표현해냈다. 기자로 분한 유지태에 대해서는 첫 방송부터 끝까지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게 지배적인 반응.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톤, 깔끔한 인상이 방송 기자 연기를 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실제 매우 성실하고 진중한 배우로 알려진 유지태는 현직 기자들의 캐릭터를 연구할 뿐 아니라 의상과 헤어, 목소리 톤 설정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고 이는 캐릭터에도 그대로 반영돼 수많은 김문호 기자의 팬을 양성했다.
이처럼 러브라인이 없어, 어쩌면 다소 불리한 위치에 있는 유지태가 자신만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캐릭터와, 이를 받쳐주는 오랜 내공의 연기력 덕분이다. 6년 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와 통속성을 벗어난 캐릭터로 명품 배우의 가치를 확인시켜 준 유지태가 보일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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