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들은 이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글러브와 공을 만진다. 순조롭게 풀려 프로를 거쳐 은퇴할 무렵이면 그라운드의 애환이 30년 이상 쌓이게 된다. 반평생 몸담았던 일터를 떠난다는 것은 한 꺼풀 벗겨보면, 미련이 똬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은퇴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은퇴는 올바른 판단과 과감한 결단,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두산 베어스의 간판 선수였던 김동주(39)의 뒤늦은 은퇴 선언은 그런 면에서 여러모로 진한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41)는 지난해 9월 26일(한국시간) 홈구장인 양키스타디움에서 볼티모 오리올스를 상대로 고별전을 치렀다. 이미 시즌을 마치면 은퇴를 예고해 놓았던 터. 그래서 그의 양키스타디움 고별전은 각별했고, 9회 말 극적인 끝내기 결승타까지 때려내 4만 8000명이 넘는 관중들의 기립박수 속에 영광스런 은퇴무대를 만들 수 있었다.

1995년에 메이저리그 무대에 서기 시작했던 데릭 지터는 20년 동안 양키스 한 구단에서만 활동했다. 2000년에는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올스타전과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올랐고 2003년부터 팀 주장 완장을 차고 리더 노릇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다른 표현 방식도 있다. 시애틀 마리너스의 켄 그리피 주니어는 2010년 시즌 도중인 6월에 은퇴의 변으로 “내 존재가 구단과 팀 동료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결단을 내린 사례였다.

최근에는 올해 아시안컵에서 혼신은 다한 전력질주로 팬들의 굄을 아낌없이 받았던 차두리(35)가 ‘축구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고 FC 서울도 2015년이 마지막이라고 밝혔다. 그의 은퇴는 팬들로선 아쉬움 가득한 노릇이지만, ‘선수 이후’의 인생을 일찌감치 그려놓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함이 돋보인 결단이라고 하겠다.
선동렬(52)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은 선수생활의 절정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했던 모범사례이다. 1999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를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진출을 꾀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자 현역 연장 미련을 깨끗이 접고 그대로 은퇴를 해버렸다.
최근 사석에서 만났던 선동렬 전 감독은 “나는 은퇴 문제를 놓고 늘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렇게 실천을 했다”면서 “항간에 이종범 등의 은퇴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후배 선수들이 모양새 좋게 은퇴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물론 해왔다. 선수단을 꾸려가자면 구단의 미래구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오해가 풀렸겠지만, 어쨌든 그런 일은 감독이 안고갈 수밖에 없다.”고 돌아보았다.

선동렬 같이 정상에 오른 뒤 은퇴의 길을 걸었던 김재현(40) 한화 이글스 코치의 ‘예고 은퇴’ 선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LG 트윈스에서 이적한 다음 2007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MVP의 영예까지 안았던 그는 2009시즌 뒤 “2010년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김재현은 은퇴할 무렵 “(은퇴 문제와 관련) 어떤 게 맞는다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여태껏 선배님들 은퇴 모습은 초라했다. 후배들한테 존경 받으면서 오래 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정점에 섰을 때 모양새 좋게 물러나야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물론 나도 고비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은퇴하기는 싫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시작(1994년 LG 트윈스)과 끝(2010년 SK)에서 팀 우승을 맛본 흔치 않은 사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선동렬이나 김재현 같은 은퇴를 선택하기는 힘들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조건, 그리고 여러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동주처럼 선수생활을 연장하려다 뜻과 같지 못해 ‘등 떠밀리듯’ 은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살이는 ‘인과(因果)’가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라고 시인(이형기 ‘낙화’에서 인용)은 노래했지만, 미련을 떨쳐버리는 것은 얼마만큼 어려운 것이랴.
/홍윤표 OSEN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