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정통 사극의 부활을 알렸다면, 후속작인 ‘징비록’은 좀 더 세련된 이야기로 무장했다. 조선의 근본을 바로세우고자 했던 류성룡의 이야기에서 현재 우리 사회와 정치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한 편의 정치 사극이 찾아온 것. 첫 방송을 마친 ‘징비록’은 ‘정도전’에 이어 역사 교과서를 영상으로 보는 듯한 재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14일 방송된 KBS 1TV 대하 드라마 ‘징비록’ 첫 회는 선조 시절 병조판서였던 류성룡(김상중 분)이 왕인 선조(김태우 분)에게도 직언을 하며 날카로운 대립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과 전운을 감지한 류성룡, 이에 반해 정치 권력 쟁탈에만 관심을 갖는 조선 대신들의 안일한 행보가 순차적으로 담기며 이 드라마가 왜 ‘피의 교훈’이라는 부제를 달았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사실 ‘징비록’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온몸으로 겪은 뒤, 국가 위기관리와 실리 위주의 국정 철학을 집대성해서 미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환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자 집필한 동명의 저서를 바탕으로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읍현감에서 7계단 올라간 전라좌수사로 이순신을 천거한 서애 류성룡의 개혁의지, 고뇌와 아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정치적 갈등을 담는다는 계획.

첫 방송은 정통 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답게 선굵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정치 세력을 이어가려는 이들과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류성룡 세력의 갈등의 전초전이 펼쳐졌다. 치열한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 있는 인물들의 소개를 하면서도 세력간 살얼음판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면서 시선을 끌어당겼다.
보통 드라마에서 무능하게만 그려졌던 선조의 복잡한 속내와 정치관도 담으며 여러 해석이 가능한 갈등 구조를 형성했다. 가치관이 다른 세력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이 죄 없는 민초들은 일본의 약탈에 죽음을 맞았다. 국론 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서로가 가진 권력을 움켜쥐고자 갈등을 벌이다가 정작 중요한 민심을 돌보지 못하는 일, 역사이자 현실이었다.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알리겠다는 ‘징비록’의 주제가 드라마 전반에 깔려 있었다. 첫 회는 선조가 류성룡이 자신의 안위를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에 불신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며 향후 갈등의 불씨를 지폈다.
지난 해 ‘정도전’으로 역사로 현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정통 사극의 묘미를 안방극장에 전달했던 KBS는 이번에도 웅장하고 세련된 정치 사극으로 안방극장의 흥미를 자극했다. 빠른 전개는 흥미진진했다. 역사와 정통 사극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마냥 쉬운 이야기는 아니나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마냥 어렵지는 않게 다루며 향후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화려한 영상미도 가지고 있었다. 맛보기로 살짝 공개된 임진왜란 장면은 공을 많이 들인 듯 세련됐고 정교했다. 일본의 침탈을 담은 장면은 긴박하면서도 백성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길게 담으며 슬픔이 가득하게 표현했다.
또한 정통 사극 등 배우들의 연기에 자신 있는 드라마만 할 수 있다는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표정 변화를 세밀하게 담아 극의 흥미를 높였다. 배우들의 연기 대결도 볼만 했다. 명품 배우들이 즐비하는 가운데, 류성룡 역을 맡은 김상중과 선조 역을 맡은 김태우는 첫 방송부터 날선 대립각을 세우며 두 인물의 갈등을 섬세하게 연기했다. 김상중의 무게감 있는 연기, 김태우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널뛰는 감정 연기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날 ‘징비록’은 웅장함을 살리는 연출, 배우들의 숨 막히는 감정을 보는 재미를 만든 열연, 역사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자신감이 뭉쳐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주말 드라마는 막장 전개로 무장하는 분위기를 뒤엎고, 막장 드라마를 비웃는 드라마 탄생을 알렸다.
한편 ‘징비록’은 '다모', '주몽', '계백'을 집필한 정형수 작가가 집필을, '전우'의 김상휘 PD가 연출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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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