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훔방' 제작자 "조상님 대신 고발장 준비하는 참담함 아십니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2.18 16: 42

며칠 전 SNS에서 링거를 꽂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통화버튼을 눌렀다. 설 연휴를 앞둔 17일, 안부를 묻기 위한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마침 서로가 10분 거리라는 사실에 급 번개가 성사됐다.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만난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제작자 엄용훈 대표는 "한 달 넘게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자고 식욕도 사라졌다"며 핼쑥한 모습이었다. 작은 영화를 차별하는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불공정 관행과 싸우는 건 흡사 계란에 바위 치기이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한 이상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엄용훈 대표는 개봉 2주차 때 10여개로 쪼그라들었던 스크린 수가 17일을 기해 54개로 확대됐지만 여전히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생색내듯 조조와 심야 시간대에 영화를 배정해놓고 좌석 점유율이 떨어지니 더 이상 상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만 반복한다는 거였다.

 "그쪽 논리가 이해는 됩니다. CGV의 경우 자사 계열사 CJ 돈이 들어간 '쎄시봉'을 밀어 본전을 회수해야 하니 점유율이 떨어지는데도 영화를 걸어둬야죠. '개훔방' 같은 영화는 눈엣가시이자 찬밥 신세인 거죠. 영화 선택권이 관객에게 있어야 함에도 교묘한 방법으로 배급사와 극장이 소비자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작년 12월 30일 개봉한 '개훔방'은 시사 후 호평과 함께 대박은 아니지만 적어도 100만 안팎의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됐다. 박스가 큰 성수기인데다 작품성과 오락성을 갖춘 웰메이드 영화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김혜자 최민수 강혜정 등 주연배우도 시나리오가 좋아 개런티를 양보하며 출연을 자청한 터였고 아역들의 연기는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엄 대표는 "제가 만든 영화를 제 입으로 훌륭하다고 할 순 없죠.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어 "이 싸움이 마치 저와 CGV의 대립으로만 비쳐지는데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에도 일말의 책임이 없는지 묻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대통령 호소문까지 써봤겠습니까.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온 공문을 보면 더 힘이 빠집니다. 영화는 흥행 산업인 만큼 시장의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어요. 피가 나고 살이 찢어져 치료해 달라고 했더니 항생제 몇 알 던져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화제를 바꿔 보려 설 연휴 계획을 물었지만 여전히 '개훔방' 스크린 사수에 정신이 집중돼 있었다. "저보다 더 '개훔방'을 응원해주고 있는 관객들과 좋은 영화를 만들어달라며 돈을 맡겨준 투자자, 배우와 스태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거대 자본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언젠가 공정한 상영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고 제2, 제3의 개훔방 사태가 재연되지 않겠죠."
엄 대표는 끝으로 "정확한 데이터와 팩트를 근거로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장을 접수할 것"이라며 "준비된 자료가 있지만 연휴 기간 좀 더 손질해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잘못된 관성과 관행에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 기획부터 투자, 제작, 배급, 상영까지 거대한 벨트에서 움직이는 대기업 수직 계열화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끊임없이 반복될 게 명약관화하다"며 "자본과 콘텐츠 생산자가 공존하고 무엇보다 영화가 다양해지려면 할리우드처럼 투자, 제작, 배급을 분리하는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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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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