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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선동렬의 회상, “안기부 압력으로 메이저리그 진출 좌절”


지난 2월 23일, 선동렬(52)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이 그 동안 애지중지 모셔왔던 선수생활 영광의 상징물인 각종 기념패, 트로피, 메달, 훈장 등 500여 점을 한국야구박물관추진위원회에 아낌없이 기증했다. 선동렬은 자택에서 박물관추진위원들이 자신의 기념품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옛일을 회상했다. 선동렬은 기념품이나 메달, 훈장에 얽힌 얘기를 하던 중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과 고려대 재학시절 부상 얘기에 화제가 미치자, 그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메이저리그 진출 시도가 좌절된 사실도 털어놓았다.

선동렬은 “메이저리그 진출이 안기부의 압력으로 무산됐다”는 뜻밖의 발언을 했다. 경위는 이렇다.

선동렬은 1982년 9월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강적 미국 대만 일본전에만 등판, 모두 완투승 혹은 완봉승을 거두며 한국의 대회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그로 인해 ‘선동렬’이라는 이름이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도 알려지게 됐다.

대회 직후 메이저리그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우승하고 나니까 메이저리그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그 가운데 밀워키가 가장 활발했다. 실제로 계약금 35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 무렵 당시 안기부 관계자가 선친께 전화를 걸어 해외(메이저리그)로 나가려면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나가야한다는, 엄포 비슷한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대학(고려대)에 휴학계를 내고 군(당시 육군 경리단 팀이 있었음)에 입대까지 하려고 했다”

선동렬의 1차 시도는 무산됐다. 그리고 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치러진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한국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선동렬은 다시 LA 다저스로부터 계약금 50만 달러에 영입 손짓을 받았지만 역시 군 문제로 좌절됐다. 전두환 정부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포상으로 당시 병역미필 대표선수들에게 병역 면제의 특혜를 주었다. 다만 의무사항으로 ‘동일 업종 5년간 종사’를 달았는데, 그 때문에 선동렬이 해외로 나갈 수 없게 됐던 것이다. 

1985년 선동렬은 연고 구단인 해태 타이거즈로 가는 대신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계약하고 시범경기에도 뛰었다. 외국 진출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지만, 주위에서 그의 선친한테 “외국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고향 팀으로 와서 하라”고 집요하게 종용, 결국 해태와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후반기부터 해태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선동렬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996년에야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 작은 꿈을 이루긴 했으나 끝내 메이저리그 무대는 밟지 못했다. 1999년 주니치에서 은퇴 한 뒤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으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대 최고의 투수로 선동렬과 쌍벽을 이뤘던 최동원(2011년 작고) 역시 1981년에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가계약을 했으나 그 역시 병역문제로 백지화 된 사실이 있다. 그로 인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는 최동원의 자격시비까지 일기도 했다. 최동원은 그와 관련, 지난 200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터론토와)61만 달러에 계약을 했지만 병역문제가 걸림돌이 돼 무산됐다”는 요지로 설명한 바 있다.

최동원과 선동렬의 메이저리그 진출 무산은 시대 상황이 빚어낸 그들의 운명이었다. 선동렬 전 감독이 뒤늦게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서슬 푸른 그 시대에는 안기부의 “안”자조차 발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즌 후 KIA 타이거즈 감독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조용히 쉬고 있는 선동렬 전 감독은 “당분간 지난 일을 돌아보면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1990년대 어느 날, 선동렬이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최동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제공=선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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