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으로 앞선 8회 2사 만루. 마운드에는 박정배, 타석에는 강정호. 홈플레이트를 지키고 있던 이재원(28, SK)은 포크볼 사인을 냈다. 박정배의 주무기로 강정호의 방망이를 공략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빗나갔다. 강정호의 힘찬 스윙에 맞은 공은 까마득하게 날아가 목동구장의 펜스를 넘겼다. 만루 홈런. SK는 결국 5-7로 역전패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흘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원은 아직도 그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27일 니혼햄과의 연습경기를 앞두고 만난 이재원은 그 상황에 대해 “처음에는 내가 특별히 사인을 잘못 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 후 인터뷰를 보고 망치로 뒷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강정호는 경기 후 “변화구를 노리고 들어갔다. 짜릿한 한 방이었다”라고 인터뷰를 남겼다.
강정호에게는 말 그대로 짜릿한 한 방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재원에게는 눈물의 한 방이었다. 박정배의 실투였지만 이재원은 밤새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바보구나”라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설쳤다. 자신의 어설픈 판단이 결국 경기를 그르쳤다는 자책감이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마냥 포수 마스크를 쓰는 것이 좋았던 이재원으로서는 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재원은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다. 포수 중 이재원만큼 방망이를 잘 치는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재원 또한 “방망이는 자신이 있었다. 기회가 많이 와 지난해의 성적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은연중에 자신감을 내비친다. 실제 많은 타격 지도자들도 “한 시즌을 꾸준히 뛰게 한다면 3할은 능히 해낼 수 있는 선수”라며 이재원의 재능을 높게 점친다. 하지만 그 반대의 지점인 수비에는 아직까지 의문이 따라 다닌다. “반쪽이다”라는 사람들도, “타자로 전념시켜야 한다”라는 회의론자들의 수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재원의 몸에는 포수로서의 피가 흐른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이재원이다. 그리고 투수와 마찬가지로, 포수도 맞으면서 큰다. 리그 전체 타자들의 성향과 수 백가지도 넘는 상황별 대처 능력을 한 번에 잡아낼 수는 없다. 다 경험이고, 그래서 포수는 30대가 넘어 대성하는 경우가 많다. 첫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재원도 ‘포수로서’ 그런 성장통을 겪고 있다.
김용희 SK 감독의 올 시즌 포수 구상은 이미 확고하게 섰다.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주일에 정상호가 4경기, 이재원이 2경기 정도 마스크를 쓰는 구상이다. 정상호의 체력 안배는 물론 장기적인 시선에서 이재원에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배려도 담겨 있다. 주전 포수를 노리는 입장으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재원은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재원은 “힘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두 배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일주일 2경기 포수’로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 신인 때와는 달리 이제 책임감도 생겼다는 이재원은 상대 타자 연구에도 열성이다. 하세베 배터리 코치 밑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며 동작이나 다리 움직임을 빠르게 하려는 노력은 물론 항상 볼배합을 머릿속에 그리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빠져들고 있다. 이재원은 “나도 연구를 많이 하지만, 상호형이 어떻게 볼배합을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배우는 것이 많다”라고 했다. 정상호는 물론, 리그의 모든 포수들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 만루포의 악몽이 옛날의 우스갯소리가 될 수 있을 때, KBO 리그는 역대 최고의 공수 겸장 포수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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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