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의 집’ 천호진이 연기파 배우란 이름의 무게에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연기하고 있는 태수는 겉으로는 자수성가로 중견 기업을 일궈낸 성공한 사업가에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자상한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열등감에 똘똘 뭉쳐 비열한 방법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악한이다.
28일 오후 방송된 KBS 2TV 주말드라마 '파랑새의 집'(극본 최현경 연출 지병현)에서는 교묘하게 지완(이준혁 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태수(천호진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태수는 자신의 회사에 입사시험을 본 지완을 사무실로 불렀다. 지완은 태수의 옛 친구 상준의 아들. 태수는 과거 상준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만, 그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품고 살아온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상준의 어머니가 손자 지완의 합격을 자신에게 부탁한 사실을 이용해 “진작 말을 하든가하지. 나 너희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할머니가 안 찾아오셨으면 내가 몰라보고 떨어트릴 뻔 했다”며 지완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

사실 태수는 지완이 상준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만 해도 스스로를 “열등감덩어리”라 부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을 했었다. 하지만 지완이 자신이 그토록 열등감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상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수석으로 입사시험에 합격한 지완을 떨어트려버리고는 일부러 낙하산을 제안하는 비열함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그는 상준의 어머니 진이(정재순 분)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다며 큰 절을 하고, 지완의 입사를 철썩 같이 도와줄 것처럼 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해 자신의 회사에 오지 않으려는 지완을 불러 충고를 하며 그를 자신의 회사에 입사시키려고 했다. 겉으로는 생각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만남이었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대면이었다. 태수는 과거 자신이 상준의 밑에 있으며 느꼈던 굴욕감을 그의 아들 지완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지완을 도발했다.
지완과 함께 식사자리에 앉은 태수는 순댓국을 한 그릇만 시켰다. 그는 놀란 지완에게 "넌 네 자존심만 차리면 배부른 놈 아니냐. 배부른 놈한테 순댓국도 아깝다. 난 쓸데없는 사람한테 돈 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네가 가진 게 뭐냐. 가진 건 형태조차 없는 꿈, 야망, 자신감 아니냐. 그런 건 뭐에다 쓰냐?"고 독설을 퍼부었다.
또 그는 지완에게 "취직하려고 수십 번 떨어지면 차츰 그런 거 버리게 돼, 처음엔 꿈, 그 다음엔 야망, 열 번 쯤 떨어지다 보면 자신감도 버리고, 마지막엔 책임감도 버리지. 남은 게 아예 없으니까 끝까지 움켜쥐고 싶은 게 있지. 자존심. 달랑 그거 하나 남았네. 넌 식구들에 대한 책임감보다 네 자존심이 위지?"라고 지완을 다시 한 번 도발했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건 자존심이 아니야 자만심이지. 인정받게 하는 게 자존심이다. 네가 뭔데 벌써 인정을 받으려 하느냐. 입사 포기를 하든 말든 상관 안 해. 그 기회 더 절박한 사람한테 주면 된다"는 태수의 말이나 태도는 진지했고, 사뭇 멋있어 보이기까지했지만 상상할 수 없는 꿍꿍이가 있음을 알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반감을 더 키웠다.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바뀌는 태수의 모습은 흡사 요즘 유행하는 다중인격 소재 드라마의 주인공과 비슷해 눈길을 끌었다. 이 같은 캐릭터의 표현은 이를 해내는 연기파 중견배우 천호진의 노련한 연기가 있어 가능했다.
한편 '파랑새의 집'은 취업난에 시달리며 꿈을 포기하고 현실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그들 부모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매주 토, 일요일 오후 7시 55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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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의 집'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