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나왔을까 싶다. 잊어선 안 될 일이었지만 어느새 우리 관심사 저편으로 멀리 떠나 있는 아픈 역사, 그 역사가 두 소녀의 아름다운 우정으로 되살아났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생지옥으로 떨어진, 옛날 그 어린 소녀들과 곡 비슷한 나이일 김새론, 김향기의 명품 연기는 당시의 고통을 생생하게 복기하며 안방극장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이 이야기를 처음 쓰기로 결심한 이는 드라마를 집필한 유보라 작가. 누군가는 잊고 있는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살려 준 그 뚝심에 박수를 칠만하다.
지난 1일 방송된 KBS 1TV 광복 70주년 특집 2부작 드라마 ‘눈길’에서는 위안부수용소에서 우정을 쌓아가는 최종분(김향기 분)과 강영애(김새론 분)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앞서 1회 방송에서 영애는 종분을 뿌리치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상황. 하지만 뒤를 따라온 일본 순사들이 두 사람을 다시 수용소로 데려왔다.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영애를 구한 것은 종분을 비롯한 친구들의 눈물겨운 우정. 이들은 식음을 전폐한 영애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노력했고 영애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받아먹었다.

두 아이는 조금씩 더 친해져갔다. 경비를 피해 몰래 서로의 방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절망밖에 없는 곳이었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작은 위로가 됐다. 하지만 곧 슬픈 일들이 닥쳤다. 성병에 걸린 두 소녀의 친구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 쓸모가 없어지자 짐승처럼 버려지는 위안부들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어 종분과 영애 역시 목숨을 잃을 뻔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속해 있던 부대 전체가 종전이 가까워 옴에 따라 이동을 하게 됐고, 위에서는 위안부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종분과 영애는 총에 맞아 죽은 친구들의 시신을 뒤로 한 채 산길을 걷고, 또 걸어 도망을 쳤다. 하지만 영애는 이미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두 소녀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고 있는 할머니 종분의 삶과 교차되며 등장했다. 종분은 해방 당시 국가에서 주는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십 년 간 영애의 신분으로 살아온 상황. 그는 매일 자신의 환상 속에서 살아있는 어린 영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외로움을 견뎌왔고, 보호자 없이 거리를 전전하며 사는 이웃집 소녀를 측은해 했다. 이후 자신의 아픔에 대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소녀의 보호자가 되기로 한 종분은 종분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새 주민등록증을 만들었고, 그렇게 영애의 환영과도 작별을 고했다.
이 이야기는 유보라 작가의 의지로 시작됐다. 앞서 이 드라마의 총책임프로듀서를 맡은 함영훈CP는 지난 26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드라마 프로듀서를 십수년째 했지만 솔직히 이런 소재의 드라마를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 정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시도하기 힘든 프로젝트다“라면서 ”‘비밀’ 이후 유보라 작가의 후속작이 뭘까 기대를 많이 하고 궁금해 했다. 유보라 작가가 미니시리즈 말고 꼭 쓰고픈 얘기가 있다고 해서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 종군위안부에 대한 이야기 쓰고 싶다고 하더라“고 이 드라마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또 그는 "(유보라 작가가)개인적으로 종군위안부 수요 집회에 참석을 오랫동안 하면서 할머니 들을 뵙고,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느끼면서 의지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유보라 작가는 30대 작가고 그 시절을 살아본 분도 아니지만, 그 할머니들의 마음과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이 드라마를 써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작가님의 의지에 공감하고 의기투합해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KBS 2TV ‘비밀’로 작가로서의 필력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유보라 작가는 단막극인 ‘눈길’을 통해 다시 한 번 작가로서의 재능을 꽃피웠다. 역사에 대한 의식과 다소 예민할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하기도 한 소재를 드라마로 살리기 위한 그의 뚝심이 없었다면 이 같은 드라마가 제작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수요집회에 참석하며 위안부들의 아픔에 동참해 온 유보라 작가의 관심은 드라마 안에서 힘을 발휘했다. 드라마 속 일본에서 온 매춘부와 위안부들을 구분하는 시스템이나 위안부들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이들을 간호사로 위장한 것, 패전 후에는 이들을 사살하려고 했던 점, 성병에 걸린 위안부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살했던 점 등은 실제 일본이 종군위안부들에게 했던 만행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더불어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살려준 김새론, 김향기의 열연도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이들의 열연은 드라마의 소재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제작발표회 다시 이들의 진지했던 모습을 새삼 이해하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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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