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쉬운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풀어내는 ‘햄릿형’ 연출가가 있는 반면, 난해한 이야기라도 귀에 쏙쏙 들어오게 전달하는 ‘족집게형’ 예술가도 있게 마련이다. 영화 ‘소셜포비아’의 홍석재 감독은 후자에 속하는 신예다.
그는 뜨거운 욕망과 차가운 현실이라는 딜레마에 갇힌 20대 청춘의 불안한 심리를 인터넷 중독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과시욕, 집단 따돌림 여기에 의문의 자살 사건 등을 버무리며 그럴 듯한 상업 장편을 빚어냈다. SNS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1분도 못 견디는, 금단현상을 보이는 이들이라도 ‘소셜포비아’가 상영되는 102분 동안은 아마 휴대전화를 만지지 못할 것이다.
지웅(변요한)과 용민(이주승)은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서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족이다. 1차 합격 발표 후 기분이 나아진 지웅은 이제서야 시험을 앞두고 속세 이탈 각오로 휴대전화까지 해지한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 용민의 옥상 제안으로 뜻하지 않게 현피(서로에게 악감정이 쌓인 네티즌이 현실에서 만나 벌이는 싸움을 뜻하는 온라인 은어)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키진 않았지만 시험으로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무엇보다 절친 용민이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었던 현피. 남자 비하 발언과 악플로 마녀사냥의 타깃이 된 레나(하윤경)의 집에 도착한 타격대는 랜선을 목에 감고 자살한 그녀의 시체를 발견, 혼비백산하게 되고 이 모습은 생생히 인터넷 방송에 실시간 중계되며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소셜포비아’가 관객과 지능 대결을 제안하는 건 경찰 시험에 불리한 기록이 남을까 봐 불안해진 두 주인공이 레나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직접 범인을 잡기 위해 사건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신분증과 권총을 반납한 베테랑 형사가 제도권 밖에서 맹활약할 때 느끼는 일탈과 쾌감을 두 남자가 흉내 내기 시작하는데 그때마다 예상을 살짝살짝 비껴가는 드라마와 두 배우의 케미가 제법이다.
이미 독립영화계에서 박해일로 통하는 변요한 이주승의 호연은 기대 이상이고, 조단역의 연기도 평균점을 깎아먹지 않는다. ‘미생’으로 주목받은 변요한은 레나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한 살인범만 잡는다면 오히려 특채로 채용될 수 있다며 사건 퍼즐을 맞추는 지웅을 완벽에 가깝게 체화해냈다. 얼떨결에 따라간 현피 모임 때문에 자칫 인생 첫 단추가 떨어질 위기에 처한 취준생의 절박함과 잠재된 경찰의 직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딪치며 보기 좋게 관객을 리드해 나간다.
이렇게 변요한의 연기가 돋보일 수 있었던 건 그의 자력의 결실만은 아니다. 골문 앞 변요한을 위해 좌우 측면에서 쉴 새 없이 올려주는 이주승의 센터링도 한 몫 했다. 거짓으로 밝혀진 친형의 존재를 시작으로 하나 둘 용민의 의뭉스런 과거가 드러나면서 이주승의 진가가 발휘된다. 믿었던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어딘가 미심쩍은 용민을 리드미컬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솜씨와 진폭이 보통 이상이다. 선악이 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마스크도 적중했지만, 무엇보다 감독의 디렉션 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게 주효했다는 생각이다.
흔히 이런 인디 영화들이 범하기 쉬운 대표적 오류가 독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벌어지는 대중적 괴리인데 ‘소셜포비아’는 그런 지점에서 덫을 요리조리 피해갔다는 인상이다. 마치 부모의 잔소리에 반항할 것 다 하고 놀 것 다 놀면서도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얄미운 모범생을 보는 기분이랄까.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의 전액 투자와 2014년 화려했던 독립영화제 수상 경력, 제작 1년이 지난 창고 영화라는 핸디캡에도 불구 3월 비수기 극장가의 활력소로 승산 있을 것 같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한 남자 선수가 결승에서 패하자 여자 악플러가 그에 대해 악성 댓글을 달고, 그 여자의 신상을 턴 남자들이 PC방에 모여 현피하려 했던 실화를 모티프로 했다. 단편 ‘필름’ ‘과월 사랑세 납부고지서’ ‘Keep Quiet’로 주목받은 중앙대 영화과 출신 홍석재의 장편 데뷔작이다. CGV 아트하우스 배급으로 15세 관람가다. 1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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