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한류, A/S 절실한 타이밍[김범석이 간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3.15 08: 11

이제 지구촌 어디를 가더라도 삼성이나 LG 가전제품을 발견하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배낭여행의 메카인 태국 방콕 카오산로드의 7불짜리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배불뚝이 삼성 TV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셔터를 눌렀던 게 벌써 20년 전 아련한 추억이다.
 닷새째 머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도 현대 쏘나타 택시와 더불어 여전히 건재한 K팝 열풍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창이 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이동한 곳은 숙소가 있는 마리나베이. 국토가 좁은 싱가포르에서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이라고 했다. 한국 여권을 건네받은 프론트 직원은 능숙하게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눈을 맞췄고, 1년 전 눈 구경하러 한국 스키장을 가봤다는 말도 곁들였다.
컨시어지의 도움으로 그날 밤 호텔에서 5분 거리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부터 찾았다. “놓치지 말라”는 직원의 강추도 있었지만, 도시와 자연의 공존을 컨셉트로 한 싱가포르의 최근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도 앞섰다. 거대한 실내 식물원인 폭포 습지 공원도 좋았지만, 이곳의 백미는 역시 슈퍼 트리 그로브(Super tree grove)라 불리는 인공 나무 조명쇼였다.

땅거미가 진 밤 7시 45분. 장중한 음악과 함께 화려한 조명이 슈퍼 트리를 장식하자 바닥에 누운 채 휴대폰을 들고 있던 500여 명의 관람객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특히 쇼 중간쯤 소녀시대의 지(gee) 전주가 나오자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이가 많았다. 관광객에게 익숙한 유명 팝, 뮤지컬 곡과 함께 소녀시대 노래가 당당히 한 파트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음날 샴쌍둥이 머리 분리 수술을 성공해 유명해진 부기스의 한 병원을 찾았다. 택시를 탔는데 도로에서 굉장히 익숙한 노래가 귀에 감겼다.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었다. 속으로 ‘이게 언제 적 노랜데 아직 듣나’ 했는데 노래의 진원지를 확인하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할리 데이비슨을 몰며 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교차로 신호에 걸려 바로 옆에 정차해있던 그에게 물었다. “헤이 바이크 맨, 싸이 알아요?” “알고말고. 한국 출신 월드 스타잖아. 유튜브 기록도 갈아치웠고. 너도 한국에서 왔니?” 2층 힙합버스에 타고 있던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엔조이 싱가포르”를 외치던 이 폼생폼사 남자는 시원하게 택시를 앞질러 리틀 인디아 쪽으로 향했다. 이를 본 30대 택시 기사도 “이영애 이민호를 좋아하는데 케세이라는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한번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대관람차 인근의 선텍 쇼핑몰. 외곽에 있지만 중심가 오차드로드 부럽지 않은 명품 숍이 가득했다. 여기서도 샤이니와 2NE1 노래가 이곳저곳에서 들렸고, 김우빈 송혜교의 대형 광고판도 눈에 띄었다. 송혜교는 장기 집권중인 라네즈 아시아 모델로, 김우빈은 한 의류 브랜드의 글로벌 모델로 각각 활약중이었다. 중국계가 70%가 넘는 다인종 국가 싱가포르에서 송혜교는 중장년층도 아는 간판급 한국 스타라고 했다.
열 명 넘게 “혹시 김우빈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연거푸 퇴짜. 드디어 “안다”고 답한 말레이계 10대 여학생을 푸드 코트에서 마주했다. “김우빈을 어떻게 알게 됐어?” “인터넷으로 우빈이 나온 드라마를 봤지.” “그가 왜 좋아?” “핸섬하잖아. 키도 크고.” “싱가포르에도 잘생긴 연예인이 많을 텐데.” “많지. 하지만 한국 드라마가 너무 재밌어서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들까지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 문화 상품의 원천 핵심인 컨텐츠의 위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가전제품 매장에선 한 컴퓨터 배경화면에서 쉬지 않고 티아라의 ‘넘버 나인’이 뮤직비디오와 함께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다음 숙소가 있던 차이나타운의 OG라는 로컬 백화점은 아예 외벽에 ‘Korea Currents’라는 대형 입간판을 걸어놓고 화장품, 문구류, 식품을 팔기도 했다.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진풍경까진 아니었지만 많은 여성들이 이 부스에 들러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었다.
 거리에서 엑소 노래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한류 열풍이 대단하다고 단정할 순 없다. 일시적인 유행일 수 있고, 사후 관리가 취약하면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그라질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느낀 한류는 단순히 몇몇 가수의 노래와 상품의 상륙보단 한국적인 스피릿이 어느 국가보다 잘 정착돼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팬 미팅이나 악수회 명목으로 현지 팬들을 ATM으로 여겼다가 역풍을 맞은 몇몇 톱스타의 일본 사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다 체계적이고 진심이 담긴 한류 AS가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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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터테인먼트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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