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업 논란이 일단락됐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한 발 물러섰다. 야구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용두사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 명제임은 분명한 까닭이다. 이제 공은 현장으로 넘어갔다.
KBO는 16일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촉진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논란이 됐던 일부 안건을 수정해 발표했다. 당초 KBO는 올 시즌 경기시간단축을 위해 스피드업에 관한 규정을 강화했다. 타자가 타석을 '불필요하게' 이탈했을 때 자동 스트라이크를 선언하겠다고 했다. 또한 대기하는 타자도 10초 안에 타석에 들어서도록 했다. 이를 위반했을 때 역시 자동 스트라이크라는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규정했다.
이미 시행이 예고된 규정이었지만 막상 시범경기가 시작되자 불만이 속출했다.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2S 상황에서 스트라이크를 선언 받아 ‘자동 삼진’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부작용을 눈으로 확인한 현장은 일제히 반기를 내걸었다. 팬들의 여론도 좋지 않았다. 경기 촉진은 좋지만 야구 근본에 외부 요소가 개입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KBO도 이와 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자동 스트라이크 선언을 벌금 20만 원(퓨처스리그 5만 원)으로 대체했다. 걷힌 벌금은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쓴다. 논란은 일단락된 분위기다.

▲ 스피드업, 왜 중요한가
벌금의 규모가 크다는 지적은 있다. 이 벌금을 매겨야 하는 심판의 부담이 커졌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KBO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룰은 없애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해 KBO 리그의 평균 경기 시간은 3시간 27분에 이르렀다. 메이저리그(MLB)에 비하면 20분 이상 길고 일본프로야구와 비교해도 10분이 길다. 경기가 지나치게 늘어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불필요한 경기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현장도 이견의 목소리가 없다. 취지 자체는 모두 이해한다.
이 룰이 제대로 시행되면 경기 시간 단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지배적이다. KBO의 연구 결과, 지난해 지방구단의 한 타자는 공 5개를 보는 데 2분16초가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긴박한 상황도 아니었다. 부상 등 특별한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불필요하게 타석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이다. KBO는 이 자투리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 타석에 5초만 줄여도, 최소 54번의 타석에서 줄일 수 있는 전체 시간은 4분30초나 된다. 다른 규정의 힘까지 합세한다면 10분가량도 줄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0분 더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이 있을 수는 있다. 실제 경기 시간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는 팬들도 많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경기 시간에 부담을 느끼는 팬들도 적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골수팬’만 찾는 야구장이 아닌 까닭이다. 한 야구장 관중에 대한 통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년에 1~3번 야구장을 찾는 팬들이 절반이 넘는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늘어난 경기에 거부감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팬층들이다. 불필요한 요소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는 불만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미래의 골수팬들을 잃을 수 있다.
여기에 급속도로 늘어난 가족단위 팬들에게도 늘어나는 경기 시간은 큰 부담이다. 아이들의 문제보다 민감한 것은 없다. 한편 수도권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지방의 경우는 오후 10시가 넘어가면 행선지별 대중교통이 불편한 경우도 많다. 여러 가지를 다 따져봐도 경기가 박진감을 유지하면서 빨리 끝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급박한 8회,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는 여기서 마칩니다"라는 멘트를 떠올려도 10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 현장의 의식변화가 궁극적인 답
이는 MLB와 일본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평균경기시간이 2시간대에서 3시간 2분까지 늘어난 MLB는 초비상이 걸렸다. ‘3시간 이내로 줄이지 못하면 리그가 망한다’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마이너리그부터 강도 높은 스피드업 규정의 실험에 들어갔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석에서 불필요하게 벗어나면 벌금을 낸다. 일본도 최근 ‘게임운영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의 주된 목적 역시 경기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일본의 경기시간도 1995년의 2시간 59분에서 지난해는 3시간 17분(9회 종료 경기)으로 크게 늘어났다.
미·일의 경우는 방송사 중계에 굉장히 민감하다. MLB가 스피드업에 사활을 거는 것도 사실 이런 어마어마한 중계권과 연관이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상파 방송 중계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 임한 한 방송 관계자는 평소 경기를 중계해야 큰 경기 중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룰에 어쩔 수 없이 편성하는 경우도 적잖다고 털어놨다. 6시에 시작하는 일본이 경우 9시에는 경기가 끝나야 다른 인기 프로그램으로의 무난한 연결이 가능하다.
이런 미·일의 이야기는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현장과 그라운드는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살기 위해 현장도 협조할 부분은 협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늘어나는 경기 시간으로 중계에 난항이 생기면 장기적으로 중계권료 수입은 상승세가 한풀 꺾일 수도 있다. 평균 관중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단 수입이 쪼그라든다. 선수들이 받는 연봉에도 영향이 있기 마련이다. 비약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지금 이 시점 MLB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대목이다. 100년, 1000년 잘 나갈 것처럼 보이는 MLB가 심심해서 스피드업을 외치고 있는 게 아니다.
일본은 ‘게임운영위원회’에 아예 프로야구 선수회도 한 축으로 참여하고 있다. 마쓰바라 선수회 사무국장은 “선수들도 경기 시간의 단축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입장료 수입이 줄면 자신들의 연봉도 줄어든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는 신적인 영역으로 추앙받는 야구인들이지만 이들도 어쩔 수 없는 노동자들이다. 경기 시간이 늘어져 흥미가 떨어지면 이 무대에 맺히는 돈의 열매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본 야구계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직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스트라이크 규정은 과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선수들의 인식도 조금씩 바뀔 필요가 있다. 리그의 장기 흥행을 위해 필요한 점이 있다면 협조할 부분은 해야 한다. 평생 해왔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스피드업에 대한 협조 의식을 좀 더 염두에 두고 그라운드에 나설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현장의 분위기는 "그런 걸 왜 하나"에 가깝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는 물이 고인다. 좋은 취지의 장기적인 계획에도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말’ 불필요한 동작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향후 프로에 입문할 아마추어 선수들의 습관에 '스피드업'이 새겨진다면 어떨까. 궁극적으로는 스피드업 규정도 사문화될 수 있다. 모든 선수들이 군더더기 없는 경기 준비를 하는 데 규제가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올해의 논란이 그 시발점이 돼야 이 진통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5일까지 시범경기 경기 시간은 전년(3시간)에 비해 14분이 줄었다. 조금만 신경쓴다면, 리그와 현장 모두 좋은 결과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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