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주유소에서 ‘가득’을 외치고 시동을 켰을 때 끝까지 올라가 있는 주유 계기판을 본 느낌이랄까. 빈틈없이 채웠다는 포만감과 기특함, 당분간 기름 넣을 일 없다는 데서 오는 괜한 뿌듯함. 영화 ‘화장’을 보고 쉽사리 등을 뗄 수 없었던 건 이런 흡사한 감정 외에 인생의 먹먹함과 노장에 대한 경외감 등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여운이라면 보기 전 좀 더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명필름의 창사 20주년 기념작이라는 수사를 제외한다 해도 ‘화장’은 안성기라는 명배우의 진면목을 담아낸 그릇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한다. 50대 이상 관객에겐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반자로, 30~40대에겐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동네 형이나 오라버니로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온 것 같은 믿음직한 상록수 배우. 20대에겐 아무래도 '깊고 푸른 밤'이나 '고래사냥' 보단 ‘라디오스타’ ‘화려한 휴가’ ‘7광구’ ‘부러진 화살’로 더 익숙할 것이다.
아역 출신 안성기를 대면하거나 그를 떠올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고착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바로 ‘남부군’ 출신 스태프에게 들었던 일화다. 주인공에게도 각방이 제공되지 못 했던 빠듯한 시절. 전라도 한 여관에서 안성기와 2인1실로 방을 쓰게 된 스태프는 어느 날 밤 선배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불을 끄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안성기가 이불을 덮고 “그만 자자”고 해야 비로소 소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선배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문을 열었고, 스태프는 속옷 차림으로 쭈그리고 앉아 뭔가에 잔뜩 열중해 있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선배님 뭐 하세요”라고 묻자 비로소 고개를 돌려 씽긋 웃던 그는 대답 대신 만지작거리던 군화 한 켤레를 내밀어 보였다.
다음날 촬영을 앞두고 너덜거리는 느낌을 내려고 솔과 망치로 손수 신발을 길들이는 중이었다. 제작부와 소품 담당이 따로 있었지만 후배들 쪽잠을 방해할까 봐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군화와 한 밤중 씨름을 벌였던 것이다.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어때? 이 정도면 간지나지 않냐”라며 환하게 웃던 그의 표정은 스태프의 존경 지수를 끝까지 올리고 말았다.
25년 전 ‘남부군’ 화장실 에피소드가 당시 영화계의 귀감이 됐다면, 신작 ‘화장’에서 김호정과 보여준 화장실 신은 당분간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뇌종양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를 돌보는 남편 오 상무. 지출 부서인 마케팅 담당 상무로 오너에게 인정받지만 사내 영업팀, 연구팀의 견제와 간섭도 신경 쓰고 막아내야 하는 가엾은 임원이다.
화장품 회사 차기 부사장으로 거론될 만큼 직장에선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조만간 병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고 예비 홀아비인 그 역시 스트레스와 노화 탓에 전립선 비대증으로 소변 한 번 시원하게 못 보는 처지다. 전립선 비대는 성공 프로세스에 갇힌 채 모든 걸 억누르느라 급기야 아무 것도 분출할 수 없게 된 이 시대 중년남의 낭떠러지를 상징하는 메타포일 것이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이 만큼 올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위해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병수발 하지만 대소변조차 가릴 수 없게 된 아내는 수치심과 자괴감 때문에 남편을 밀어내려 한다. 기저귀도 부족해 오물이 묻은 아내의 사타구니를 샤워기로 닦아내는 오 상무는 “괜찮아, 나한테 의지해”라고 다독이지만 그럴수록 아내는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고 마음이 딴 곳에 가있는 남편의 자상한 손길도 뿌리치며 속으로 절규하게 된다.
별장에서 나누는 이들 부부의 섹스도 슬프고 처연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육체적 결합을 위해 오 상무는 발기부전 알약을 복용하고,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부하 직원 추은주(김규리) 대리를 끊임없이 떠올린다. 남편을 받아들이는 아내 역시 직감적으로 그런 불온함을 느끼지만 끝까지 표출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편을 위로한다. 성행위 중 남편의 러닝셔츠와 맨몸을 맹렬하게 오가며 쓰다듬는 그녀의 손짓이 애처로워 보인 건 그래서다. 죽기 전 남편에게 택배로 부친 세 병의 와인은 아내의 관용과 어쩔 수 없는 원망, 사랑과 증오가 복합적으로 담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안성기는 문제의 베드신에 대해 “사실 결혼 후 처음 찍어본 베드신이라 무척 긴장했다”며 “찍기 전 감독님, 호정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원 신 원 컷으로 간결하지만 최대한 임팩트 있게 정성을 다해 촬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픈 아내를 먼저 보내야 하는 오 상무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오락성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힘든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곱씹어보게 하는 힘과 위로가 담긴 만큼 대중들과 소통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출연작 수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 할 정도로 한국 영화와 일편단심 연애해 온 안성기가 ‘화장’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 궁금하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지만, 순제작비 26억원이 든 ‘화장’에서 43회차 100% 출석이라는 존재감을 보인 그는 어떤 배우보다 자신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온 독한 남자임에 틀림없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환한 웃음에 쉽게 속으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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