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포츠의 주인은 팬이다. 하지만 국내의 사정은 과연 그럴까. 프로농구 코트에서 주객이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은 지난 27일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원래 오후 7시였던 2,4차전 경기시간을 각각 오후 5시와 4시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공중파 중계를 위해 경기시간이 변경되는 것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다.
지난해에도 KBL은 지상파 중계를 위해 토요일 오후 2시로 잡혔던 챔피언결정전 3,7차전 경기를 각각 오후 3시 7분과 오후 3시로 각각 변경했었다. 하지만 토요일이라 큰 파장은 없었다.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2차전은 화요일에 열린다.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이 화요일 오후 5시에 시작하는 경기를 현장에서 관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KBL이 공중파 중계를 위해 한 시즌 동안 충성스럽게 경기장을 찾은 울산 팬들의 관전을 일부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팬들은 반발하고 있다. 이미 팔린 1200장의 예매분 중 이미 수 백 장이 취소됐다. 이도 모자라 팬들은 29일 챔피언결정전 1차전 3쿼터에 기습적으로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했다. 걸개에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 KBL의 무능행정’, ‘먹고 살기 바쁜 평일 5시가 왠말이냐’, ‘소통 없는 독재정치 김영기는 물러나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기습시위를 벌인 팬들은 시즌권을 갖고 있는 울산의 골수팬들이었다.
구단 관계자는 정중하게 팬들을 만나 현수막을 건네 달라고 부탁했다. 팬들은 순순히 현수막을 내줬다.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4쿼터 종료 2분여를 남기고 같은 현수막이 다시 걸렸다. 팬들은 압수당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똑같은 현수막을 2개씩 준비한 것.
문제가 커졌다. 현장에 있던 KBL 직원들이 직접 나서 현수막 철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팬들과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그 과정에서 한 팬이 허리를 삐끗해 응급실로 가는 소동이 발생했다. KBL 직원에게 책임을 묻는 고성이 이어졌다. 모비스 관계자는 양측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KBL측이 대화와 타협을 생략하고 물리력을 동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KBL은 자신들의 가장 충성스러운 고객에게 직접 피해를 끼친 셈이 됐다. 주객이 전도됐다. 팬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KBL은 무슨 근거로 팬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것일까. KBL 대회운영요강 제1절 경기장 부문 제24조 홈팀의 책무에 보면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홈팀과 방문팀은 경기 중 응원단의 질서유지를 위해 적절히 조치를 취하여 사고 방지에 노력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경기장내 응원도구는 사용 7일전에 경기위원장의 승인을 득한 후 사용이 가능하다’고 돼있다.
규정을 따져보면 응원단의 현수막은 경기위원장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에 응원목적으로 사용이 불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관중이 자기 자리에서 현수막을 걸었다고 질서유지에 피해를 줬다고 보기는 어렵다. 팬들은 현수막을 투척하는 등의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KBL 직원들이 타협하는 과정 없이 현수막을 뺏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경기진행을 방해한 것은 팬이 아니라 KBL 관계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KBL이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KBL이 월권을 행사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소란이 빚어지면서 해당 장면은 스포츠 방송사 중계화면에도 잡혔다. 사건을 축소하려던 KBL이 외려 일을 크게 키운 셈이 됐다.
물론 KBL도 사정이 있다. 명승부가 펼쳐지는 챔피언결정전은 KBL이 가진 최고 콘텐츠다. 이것을 공중파를 통해 방영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충성스러운 팬들의 경기관람에 지장을 준 것은 심각하게 유감스러운 일이다.
KBL의 문제해결 방법도 아쉽다. 팬들과 명확한 소통 없이 ‘볼 테면 알아서 보라’는 식의 KBL의 고압적 자세는 팬들의 화를 더욱 돋우고 있다. KBL은 문제점 해결보다 눈치보기에 더 바쁜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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