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투수들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는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실제 처우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선발투수들에 비하면 조명을 덜 받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선발투수들이 경기를 만들어가는 임무를 맡기 때문인데 실제 가장 중요하기도 합니다. 반면 행여 경기가 뒤집어지기라도 하면, 불펜투수들은 온갖 야유와 싸워야 합니다. “잘해도 본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지요.
그런 불펜에도 명과 암은 있다고 합니다. 불펜에서 하는 우스갯소리인데요. 필승조 선수들이 ‘귀족’이라면, 흔히 말하는 추격조나 롱릴리프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노동자’라고들 한답니다. 필승조 선수들은 경기에 나설 때가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추격조 선수들은 그런 게 없습니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면 그날이 출격하는 날입니다. 혹은 크게 뒤진 시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등판하는 것을 좋아하는 선수는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빛이 안 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프로야구는 콜드게임이 없습니다. 선발이 3이닝을 던지고 무너지면, 다른 선수들이 5~6이닝을 던져야 합니다. 지든 이기든 그래야 경기가 끝이 납니다. 누군가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그럴 때 호출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롱릴리프로 불리는 선수들입니다. 제 담당구단인 SK는 13명의 투수 엔트리를 운영하고 있고 채병룡 고효준 박종훈 선수까지 3명의 선수가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막 후 이 선수들이 빛을 본 경기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16일 인천 넥센전에서 채병룡 선수가 엄청난 활약으로 이 보직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습니다.

선발 밴와트 선수가 1회 타구에 맞아 교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선발이 1회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당연히 불펜에는 몸을 푸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채병룡 선수가 총대를 멨습니다. 부랴부랴 몸을 풀기 시작해 2회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사실 다른 불펜 투수들이 준비할 시간만 벌어줘도 성공한 임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병룡 선수는 7회까지 단 한 타자에게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퍼펙트 피칭’으로 SK 승리의 버팀목이 됐습니다.
이 투구가 더 대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언제 나갈지 모르는 선수들이라 아무래도 경기에 대한 집중력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들쭉날쭉한 등판 일정에 컨디션을 정점에 맞추기도 쉽지 않은 보직입니다. 그럼에도 베테랑답게 엄청난 집중력과 투혼을 보여준 셈이지요.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친 이유입니다. 나머지 2이닝을 차분히 정리한 박종훈 선수의 피칭도 좋았습니다. 좀처럼 등판 기회가 오지 않아 코칭스태프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던졌습니다.
이날 등판하지는 않았지만 고효준 선수도 뒤진 경기에 나와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선보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3월 28일 대구 삼성전에서 62개, 4월 3일 목동 넥센전에서는 83개를 던졌습니다. 고효준 선수 덕에 다른 불펜 요원들은 다음 경기를 기약하며 힘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성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공교롭게도 SK는 그 다음 2경기에서 모두 이겼습니다. 이기는 상황이 찾아왔고 전날 쉰 불펜이 총동원되며 팀 승리를 지켜냈습니다.
경기 후 김용희 감독도 한숨을 돌리며 이 대목을 칭찬했습니다. 김 감독은 세 선수에 대해 “정말 궂은일을 하는 선수들이다. 컨디션 관리가 쉽지 않은 보직이다.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칫 늘어질 수 있는 보직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펜에서 교체 타이밍이나 집중력에 대한 관리와 호흡이 중요한데 김원형 코치가 관리를 잘해주고 있다.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많이 좋아졌다. 정말 고맙다”라고 흐뭇해했습니다. 이 선수들이 꼭 빛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팬들의 관심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역투를 펼친 채병룡 선수는 김용희 감독의 말을 전해 듣고 “궂은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궂은일인데, 그렇지 않다는 말에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채병룡 선수는 “오늘과 같은 상황에 대비해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불펜에서 팀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래서 궂은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면서 하고 있다”라고 불펜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우문현답의 현장이었습니다.
새삼 SK의 ‘ONE Team, ONE Spirit(하나의 팀, 하나의 정신)’이라는 올 시즌 새 슬로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1군 엔트리에 있는 27명의 선수들이 모두 빛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의 팀, 하나의 정신으로 뭉친다면 팀 전체가 승리라는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채병룡 선수의 역투, 그리고 롱릴리프 선수들의 희생정신이 승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말입니다. 가끔은, 지는 경기에서 등판을 마무리하고 외롭게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이 선수들에게도 큰 박수를 쳐줘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팀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SK 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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