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이닝소화를 가리지 않는다. 어려운 팀 마운드 사정에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고 있다. 그래서 팬들로부터 더 큰 박수를 받는다. 기록 이상의 가치다.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권혁(32, 한화)과 장시환(28, kt)이 시즌 초반 KBO 리그 투혼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권혁과 장시환은 초반 불펜 전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들이다. 물론 이들이 세이브나 홀드 부문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팀이 필요할 때 묵묵히 마운드에 올라 역투를 펼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권혁은 한화 초반 상승세의 일등공신이고 장시환은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kt의 한가닥 위안이라고 할 만하다.
올 시즌 전업 불펜투수 중 20이닝을 넘게 소화한 선수는 권혁(22⅓이닝)과 장시환(20⅓이닝) 뿐이다. 특히 권혁은 규정이닝을 소화한 유일한 불펜투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두 선수 모두 현재 페이스라면 100이닝은 거뜬히 넘길 추세다. 권혁은 올 시즌 372개의 공을 던졌고 장시환도 328개의 공을 던졌다. 역시 전업 불펜투수로 300개 이상의 공을 던진 투수는 이 두 명뿐이다.

권혁은 말 그대로 독수리 투혼의 상징이 되고 있다. 어려운 팀 불펜 여건, 그리고 김성근 감독 특유의 불펜 총력전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무려 14경기에 마운드에 올라 22⅓이닝을 던지며 1승1패3홀드4세이브 평균자책점 3.63을 기록 중이다. 평균자책점이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을 수 있지만 권혁의 경기 내용을 본 팬들의 시선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난해 권혁은 삼성 불펜에서 제한된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왼손 스페셜리스트로 나섰다. 39경기에서 34⅔이닝만을 소화했다. 2타자 이하를 상대한 경기가 14경기였다. 그러나 올해는 완전히 딴판이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팀이 필요한 시점에는 어김없이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2타자 이하를 상대한 경기는 딱 3경기에 불과했다. 오히려 5타자 이상을 상대한 경기가 10경기로 절대적이었다. 2이닝 소화 경기도 6경기나 됐다.
장시환은 kt 불펜의 가장 든든한 믿을맨이다. 선발과 불펜 사정이 모두 어려운 kt의 팀 여건상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는 조기 등판도 불사한다. 9경기 중 2이닝 이상 소화 경기가 5경기나 됐고 1이닝 이하 소화 경기는 2번에 불과했다. 경기당 평균 소화이닝만 따지면 오히려 권혁보다 많다.
체력적으로 관리가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구위는 힘이 넘친다. 22일 수원 SK전에서는 위기에 빠진 선발 정대현을 4회 구원해 5⅓이닝 동안 3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으로 버티며 프로 데뷔 후 첫 승을 거두기도 했다. kt의 사정상 타 팀에 비하면 믿을맨의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그래도 5⅓이닝 소화는 파격적이었다. 9경기에서 평균자책점 3.10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공에 대한 자신감도 늘어나고 있다.
물론 두 선수가 이런 페이스를 계속해서 가져가기는 힘들다. 시즌 초반 힘이 남아있을 때의 변칙 운영이라고 보는 것이 가깝다. 하지만 두 선수는 앞으로도 이런 강행군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뭉쳐 있다. 이들이 버티는 사이 새로운 불펜요원들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가치는 더하다. 투혼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두 선수가 앞으로도 든든한 핵심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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