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삼성)의 대기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KBO 리그 역대 통산 400호 홈런에 단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프로의 역사가 짧은 우리 사정에서는 리그를 대표할 만한 금자탑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의 영광에 한정할 만한 일도 아니다. 모든 팬들의 관심이 이승엽에게 몰려 있는 이유다.
언젠가는 홈런을 칠 것이고, 이승엽은 화려한 조명을 받을 것이다. 모든 팬들과 언론에서는 기립박수가 쏟아질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라는 건 이면이 있다. 모두가 승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이승엽이 있는 반면, 그 화려함 뒤에 아쉬움을 곱씹는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승엽에 홈런을 맞을 투수, 그리고 팀에는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이승엽의 400호 홈런을 언급할 때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역사에 남을 것이다. 당하는 쪽에서는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피하고 싶은 상황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논란이 생긴다. 5월 31일 잠실구장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LG는 3-9로 크게 뒤진 9회 2사 2루에서 이승엽을 상대했다. 이날 이승엽은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와 큼지막한 파울홈런을 치는 등 감이 좋았다. 마지막 타석에서 팬들이 400호 홈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LG는 굳이 이승엽과 정면승부하지 않았다. 일어서지만 않았지 사실상 고의사구였다.

포수 유강남은 홈플레이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인간의 팔 길이로는 칠 수 없는 코스로 공이 연달아 4개 들어갔다.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승부를 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400호 홈런 희생양이 되기 싫어 피했다”라는 인식의 공감대가 잠실구장을 지배했다. 거센 비난과 야유가 일어난 이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승엽의 400호 홈런 도전은 그렇게 LG와 상대 투수 신승현을 피해갔다.
지나간 일이다. “승부를 고의로 피하지 않겠다”라고 감독이 공언했던 LG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감이 좋은 이승엽을 거르고 다음 타자 박해민을 잡아 마지막 공격에서 대역전극을 노렸을 수도 있다. 혹은 벤치 판단이 아닌, 배터리 사이에서의 판단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신승현은 입지가 단단한 선수가 아니다. 이 이닝을 실점 없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시 2군으로 갈 수도 있다. 이런 종합적인 상황도 이승엽의 400호 홈런과 동일하게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행여 400호 홈런의 허용을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이는 문제가 있는 일이다. 희생양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수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생긴다”라는 주장도 그렇게 설득력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 투수에게 피홈런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이승엽의 400호 홈런이 경기를 결정짓는 극적인 상황에서 터진다면, 400호보다는 경기의 승패가 더 중요한 것도 당연하다.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는다고 해서 나무랄 팬들도 없다. 2003년 이승엽의 56호 홈런을 허용했던 이정민(롯데), 2013년 KBO 리그 최다 홈런 기록(352호) 당시 홈런을 맞은 윤희상(SK)을 비난한 팬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이승엽의 기량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승부를 펼친 투수들로 기억될 뿐이다.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았다고 해서 연봉이 깎인 것도 아니며, 선수 생활에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더 판이 큰 사례도 있다. 2001년 배리 본즈에게 71호, 72호 홈런을 연거푸 맞은 박찬호 또한 아무런 문제없이 대형 FA 계약까지 체결했다.
352호 홈런을 허용했던 윤희상은 당시 “볼넷을 주면서 피하기보다는 승부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더 이기고 싶고 승부하고 싶었다”라면서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했었다. 투수의 본능이다. 이승엽은 당시 “승부는 승부다. 나도 삼진도 당하고 범타로 물러난 적도 있지 않나. 언제나 늘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했다. 타자의 본능이다. 이런 본능의 충돌 속에 오늘도 야구는 계속된다. 400호 홈런을 맞는 것보다, 두려움 속에 그 본능을 접고 꼬리를 내리는 것이 더 창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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