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믿으니까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라”.
KIA 타이거즈 외국인 투수 필립 험버(33)는 매 경기 생존 서바이벌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매 경기가 국내 무대 잔류 오디션과 다름없다. 당초 험버는 메이저리그 퍼펙트 게임 경력으로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좀처럼 국내 무대에 쉽게 연착륙하지 못했다. 부진을 거듭하며 지닌달 16일 광주 두산전 이후로 1군 엔트리서 말소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KIA는 양현종-조쉬 스틴슨을 필두로 선발진이 안정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은 외국인 투수인 험버가 계속 부진한다면 당연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기태 감독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적응의 문제”라면서 끝까지 믿음을 보였다. 분명 국내 야구에 적응한다면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퓨처스리그에서 컨디션을 조절토록 했다.

어찌 보면 외국인 선수도 김 감독에게는 팀의 일원이었다. 단순히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존재가 아니었다. 조금씩 팀에 스며들면 좋은 공을 던질 것이라는 것이 김 감독의 믿음이었다. 험버에 대해 말할 때면 항상 자신의 경험을 언급했다.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어려움에 대해 공감했다. 그리고 험버에게 타지인 한국에서 야구를 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줬다.
조정의 시간을 가진 험버는 지난 2일 잠실 두산전에 앞서 1군 엔트리에 복귀했다. 바로 2일 두산전에 구원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1실점의 기록. 그리고 9일 광주 넥센전에 선발 투수로 험버를 예고했다. 어찌 보면 험버는 생존 사투를 벌일 한 경기를 부여받은 셈이었다. 이 경기에서 험버는 5이닝 8피안타(1피홈런) 3볼넷 4탈삼진 3실점을 기록했다. 외국인 투수로선 부족한 성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팀 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넥센을 맞아 어느 정도 버텨줬다. 특히 이날 경기 전까지 KIA는 넥센에 1승 5패로 뒤지고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험버는 5이닝을 잘 견뎠다. KIA는 0-3으로 뒤진 5회말 2사 만루서 김주찬의 사구, 브렛 필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험버도 승리 요건을 갖췄고 팀도 7-4로 승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날 경기에서 언제든지 험버를 내릴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험버의 구위는 넥센 타자들을 압도할 순 없었다. 그러나 험버는 위기관리 능력을 뽐내며 실점의 순간마다 병살타로 위기를 극복했다. 5회초엔 스나이더에게 우전안타, 박병호에게 우중간 2루타를 허용하며 무사 2,3루 절정의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유한준을 유격수 라인드라이브, 김민성을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2아웃까지 잡은 상황. 여기서 김 감독은 마운드를 방문했다. 교체 의사는 아니었다. 경기가 끝난 후 험버에게 묻자 “감독님이 ‘너를 믿으니까 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라’라는 말로 믿음을 심어줬다”라고 답했다. 결국 위기의 순간에서 김 감독이 건넨 말은 용기를 북돋아준 한 마디였다. 그리고 험버는 보란 듯이 이택근을 2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아웃시키며 위기에서 탈출했다.
험버의 공은 위력적이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 승리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김 감독은 일찍이 롱릴리프 투수를 투입할 수도 있는 장면에서 끝까지 험버를 믿었고, 험버는 이 믿음에 응답했다. 결국 이날 험버가 거둔 시즌 3승은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KIA의 믿음이 담긴 뜻 깊은 1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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