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 중에 더블스위치로 지명타자가 소멸되어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은 가끔씩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경우 엔트리 안에 출장하지 않은 타자가 있으면 평범한 대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가끔 투수들이 그대로 자신의 타순에 맞춰 타석에 들어서 다소 어색한 타격 폼으로 웃음을 주기도 한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번트를 위해 타자보다 번트에 능한 투수를 타석에 내세우는 것도 아주 가끔 볼 수 있다. 2012년 9월 12일 잠실 SK전에서는 타자인 박용택 대신 투수 신동훈이 대타로 들어서는 보기 힘든 일도 있었지만, 이는 작전이 아닌 경기 중에 일어난 특수한 맥락에 따른 조치였다.
8일 목동구장에서 대타로 나왔던 조시 스틴슨(27, KIA 타이거즈)이 역대 3번째일 만큼 투수 타석에 투수가 나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팀이 넥센과 3-3으로 맞서던 12회초 KIA의 마지막 공격, 2사 2루에 투수 김광수 타석이 되자 김기태 감독은 스틴슨을 대타로 기용했다. 손승락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선 그는 초구에 방망이를 힘차게 돌렸으나 헛스윙했다. 그리고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공 2개를 연속으로 지나쳐 삼진으로 물러났다.

스틴슨은 마이너리그 통산 타율 2할1푼3리(47타수 10안타), 4타점(메이저리그에서는 1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하고 한국에 왔다. 엔트리 내에 있는 타자를 다 써버린 KIA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투수들 중 고교시절 뛰어난 타격 능력을 자랑했던 신인급 선수가 있었다면 대안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타격이 나쁘지 않았던 스틴슨은 적어도 김광수보다는 좋은 결과를 기대케 하는 임시 대타였다.
스틴슨에 앞서 투수가 다른 투수 타석에서 대타 임무를 수행했던 두 번의 사례는 한 경기에 나왔다. 지난해 7월 12일 광주 KIA전에서 롯데는 10회초 강영식 대신 송승준을, 12회초에는 김승회 대타로 장원준을 냈다. 결과는 둘 다 헛스윙 삼진이었고, 롯데는 4-5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이 상황은 지명타자 최준석이 마스크를 쓰면서 일어났다. 당시 선발 출장한 포수 용덕한에 이어 강민호가 나왔다가 송은범의 공에 머리를 맞는 일이 생기자 김시진 감독은 포수 경험이 있는 최준석을 안방에 앉혔다. 그러면서 지명타자가 사라져 투수들에게 타석이 돌아간 것이다.
스틴슨이 대타로 기록지에 이름을 올린 것은 송승준, 장원준과 같지만, 이들과는 약간 다른 부분도 있다. 바로 타격 후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는 것이다. 선발 요원인 송승준과 장원준은 이날 타격을 마친 뒤 투구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날 불펜에 대기하고 있던 스틴슨은 피칭까지 소화했다.
문제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틴슨이 타석에 섰을 때는 2사였다. 루킹 삼진을 당한 후 바로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송승준과 장원준이 순수하게 타격을 위한 대타였던 반면 스틴슨은 3-3에서 적시타를 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게 하기 위한 카드였다. 그러나 12회말 스틴슨은 선두 김하성의 볼넷과 유한준의 내야안타에 흔들렸고, 고종욱의 희생번트 때 2루수 최용규가 쓰러지며 실점해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KIA는 남은 투수 중 타격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투수를 피칭에 앞서 대타로 썼다. 스틴슨을 투구에 전념케 해 무승부에 만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김광수를 그대로 타석에 두었거나 다른 투수를 대타로 기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KIA는 의외의 적시타를 뽑아낼 가능성도 고려해 스틴슨을 선택했다. 12회말 김하성을 연속 볼 4개로 내보낸 제구 불안이 타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는 못한 시도였다.
nic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