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아웃으로 들어오자마자 쌓여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누굴 탓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공세에 물끄러미 당하고 앉아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화를 참지 못했다.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냉정함을 되찾아야 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올스타 휴식기라는 시간이 있었다.
지난 9일 부상을 당한 트래비스 밴와트의 대체 외국인 선수 다시 한국 무대를 밟은 크리스 세든(32, SK)은 복귀 후 첫 경기였던 15일 마산 NC전에서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큰 의욕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3⅓이닝 동안 5실점하고 조기강판됐다. 3회까지는 문자 그대로 퍼펙트 피칭이었다. 그러나 4회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타순이 한 바퀴를 돌자 NC 타자들은 세든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 매섭게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6타자가 홈런 한 방을 포함해 연속 안타를 때렸다. 아웃카운트 하나는 안타를 친 뒤 2루로 뛰던 이호준을 잡아낸 것이었다. 세든은 그런 자신에게 화를 참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세든은 21일 인천 두산전 이후 “NC 선수들이 한 바퀴를 돌자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와 달리 나는 재빨리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나쁜 경기가 됐다. 나도 패턴을 바꿔야했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다. 너무 화가 났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김용희 SK 감독은 “엄청나게 화를 내더라. 미국 선수들 특유의 그런 것 있지 않은가”라고 당시를 떠올리면서도 “오히려 첫 경기에서 신고식을 한 것이 득이 될 수도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미 KBO 리그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가 있는 세든이기에 가능한 기대였다. 그리고 세든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냉정하게 자신을 판단했고 좀 더 냉정하게 마운드 위에서 타자들을 상대했다. 안 되는 것은 재빨리 바꾸고, 자신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는 복귀 후 첫 승이었다.
세든은 21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서 6이닝 동안 1실점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1·2회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세든은 경기 후 “초반에 공이 높아 힘든 경기를 했다. 하지만 수비가 많이 도와줬다”라면서 “1·2회에 많은 힘을 쏟다보니 후반에는 힘이 조금 떨어져 고전했다. 하지만 현재 컨디션은 매우 좋다”라고 활짝 웃었다.
고집을 버리고 냉정하게 대처한 것이 도움이 됐다. 세든은 이날 내내 주무기인 체인지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우타자 기준 바깥쪽으로 낮게 떨어져야 하는데 높은 코스에서 가운데로 떨어지는 공이 많았다. 장타 코스였다. 그러자 3회부터는 슬라이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빠른 공의 제구에 신경을 쓰며 효율적으로 두산의 불방망이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6회까지 무실점으로 내달리며 팀 승리의 발판을 놓을 수 있었다.
세든은 “체인지업이 높아 슬라이더를 사용했다. 하지만 내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체인지업을 계속 던져야 했던 부분은 있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잘 먹혔다”고 설명했다. 2013년 당시 모습의 그대로였다. 여기에 변함없는 위기관리능력을 과시했다. 100구까지 버틸 수 있는 힘만 증명한다면, SK는 후반기 대반격을 이끌 든든한 외국인 에이스 하나를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은 경기였다.
세든은 2013년과 지금의 리그 차이에 대한 질문에 “일단 지금 많이 던져보지 못해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다”라면서도 “내 스스로가 나아지길 바라고 있다. 돌아와서 기쁘고 팬들 앞에서 이겨서 기분이 좋다”라고 활짝 웃었다. 100%를 찾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SK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세든이다. SK 마운드가 돌격대장 하나를 얻어가는 분위기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