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음지였다.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추격조였다. 그래도 “1군에서 던지는 것만으로도 좋다”라고 해맑게 웃던 박종훈(24, SK)이었다. 목표는 1군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의 목표가 계속 상향조정되고 있다. 욕심이 아니다. 책임감까지 배우고 있는 박종훈이 어엿한 선발투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일이다.
박종훈은 26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KIA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6⅓이닝 동안 110개의 공을 던지며 5피안타(1피홈런) 3볼넷 8탈삼진 3실점으로 잘 던졌다. 110개의 투구수는 올 시즌 한 경기 최다이자 개인 역대 2위다. 8개의 탈삼진은 올 시즌 최다 타이 기록이었다. 비록 팀 타선 지원을 받지 못하고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임무는 다하고 내려간 한 판이었다.
의미가 있는 경기였다. 박종훈은 SK의 5선발 투수다. 어느 팀이나 그렇듯 5선발은 애당초 기대치가 그렇게 높지는 않다. 그런데 이날은 사정이 한가하지 못했다. SK는 이날 KIA와의 경기에서 패하면 5위와의 승차가 5.5경기까지 벌어질 판이었다. 지면 충격이 큰 경기였다. 여기에 전날(25일) 김광현의 갑작스러운 담 증세로 불펜 요원들이 줄줄이 나서 10이닝을 던졌다. 불펜도 여력이 없었다. 이날은 무조건 박종훈의 어깨만 믿고 가야 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그간 박종훈은 “어차피 내가 나서는 날은 불펜 투수들이 많이 대기를 한다. 그래서 많은 이닝보다는 한 이닝에 집중하려고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동료들에게 의지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공기가 달랐던 까닭일까. 박종훈은 ‘내가 책임을 진다’라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마운드에서 역투했다. 한계투구수가 넘어선 상황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까지 공을 던졌다.
기술적인 측면은 물론 내면적인 부분까지 성장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발 경험이 계속 쌓이면서 선발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책임감까지 장착한 것이다. 이제 어엿한 1군 선수의 느낌도 나고 있다. 팀으로서도 기특한 존재다. 비록 올 시즌 3승이 전부지만, 그래도 부상 없이 선발 로테이션을 지켜주며 대부분의 경기에서 5~6이닝씩을 큰 무리 없이 잡아주고 있다. 박종훈의 입지는 지금껏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박종훈의 올 시즌 첫 목표는 1군 정착이었다. 그 후 추격조에서 선발로 승격됐을 때는 “선발이든 불펜이든 가리지 않고 100이닝을 던지자”로 목표가 바뀌었다. 물론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 힘든 과정을 잘 버텨냈다. 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한 시즌을 달려온 박종훈은 26일까지 86⅓이닝을 던져 자신의 목표에 근접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할 때다. 기술적·심리적으로 크게 성장한 박종훈이라면 좀 더 큰 목표를 잡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