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다? 불펜 100이닝, 숫자로 본 미래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5.09.06 06: 01

흔히 선수들은 “마운드에는 세 가지 계급이 있다. 선발은 귀족, 다른 불펜 투수들은 노예다. 그 중 마무리는 노예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은 평민”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등판 일정이 정해져있는 선발투수들과는 달리 불펜 투수들은 그만큼 체력적으로 힘든 시즌을 보낸다는 비유다.
선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해는 ‘노예 역사’에 한 획이 그어질 수 있을 전망이다. 리그가 144경기 체제로 확장되며 모든 선수들의 개인 기록 또한 ‘확장’될 것으로 점쳐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운드 분업화가 어느 정도 정착화됐다고 생각하는 이 시점, 순수 불펜 100이닝 투수가 두 명이나 나올 줄은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권혁(32, 한화)은 이미 100이닝을 넘겨 104이닝을 던졌고 박정진(39, 한화) 또한 100이닝에 5이닝 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에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팀 사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혹사”라는 의견도 거세다. “선수가 괜찮다고 하니 일단 지켜보자”라는 말이 있는 반면, “그 상황에서 못 던지겠다고 할 투수가 누가 있나. 벤치에서 관리해줘야 한다”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실상 논란이 끝날 줄 알았던 ‘단련론’과 ‘소모론’의 이데올로기가 재충돌하고 있다.

올 시즌 한화의 불펜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많이 나와야 하는 두 선수다. 두 선수가 없었다면, 5위 싸움을 하고 있는 한화의 모습은 없었을 수도 있다. 순위 싸움이 급한 상황상 아무래도 좀 더 고생을 해야 할 공산도 크다. 그렇다면 문제는 앞으로다. 불펜 100이닝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100%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가 없는 이상, 과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 불펜 100이닝, 전 세계적으로 자취 감춰
메이저리그(MLB)는 KBO 리그에 비해서도 경기수가 더 많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불펜 100이닝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2000년 이후 ‘불펜 100이닝’을 던진 선수는 총 5명, 횟수는 6번이었다. 불펜의 철인이었던 스캇 설리번(당시 신시내티)이 2000년(106⅓이닝)과 2001년(103⅓이닝) 이 고지를 넘어섰다. 설리번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4년 연속 불펜 100이닝을 달성한 인물이다.
그 외 2003년 디트로이트와 오클랜드를 오갔던 스티브 스파크(107이닝), 2003년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던 기예르모 모타(LA 다저스, 105이닝), 2004년의 스캇 쉴즈(LA 에인절스, 105⅓이닝)가 뒤를 이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스캇 프록터가 뉴욕 양키스 시절이었던 2006년 세운 102⅓이닝이 마지막이다. 당시 프록터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83경기에 나왔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만 37세에 이 기록을 작성한 스파크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체적으로 왕성한 20대였다는 것이다. 설리번은 만 29세와 30세 시즌이었고, 프록터는 만 29세, 쉴즈는 만 28세, 모타는 만 29세였다. 권혁은 만 32세 시즌, 박정진은 만 39세 시즌이다. 박정진은 KBO 리그를 넘어, 전 세계 불펜 투수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도 있다.
미국에 비해 ‘단련설’이 좀 더 오래갔던 일본은 21세기 이후 아예 불펜 100이닝 사례가 없다. 6선발 체제가 자리를 잡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선발투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긴 이닝을 소화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장 근접했던 사례는 2001년 오카모토 아키라였는데 그는 61경기 중 1경기를 선발로 나섰고 총 소화이닝은 102⅓이닝이었다. 지난해 퍼시픽리그 불펜 최다 이닝은 사토 타츠야(오릭스)로 74⅓이닝, 센트럴리그는 마타요시 카즈키(주니치, 81⅓이닝)였다. 100이닝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 롱런 가능성은 떨어진다
팀 사정이 어쩔 수 없다 보면 불펜에서 100이닝을 던질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당연히 어깨에 피로는 누적된다. 소모설은 “투수의 어깨는 던지면 던질수록 망가진다”라고 걱정한다. 그렇다면 불펜 100닝을 던진 투수들의 그 다음은 어땠을까. 개인별로 편차가 있어 딱 꼬집기는 어렵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그 ‘100이닝’을 던진 시즌이 가장 화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술대에 오른 선수들도 있다.
만 27세 시즌부터 4년 동안 불펜에서만 무려 425⅓이닝을 던진 설리번은 일찍 지기 시작햇다. 2001년 3.31이었던 평균자책점은 2002년 6.06으로 치솟았다. 그는 2003년 64이닝, 2004년 49⅔이닝, 2003년 14⅓이닝, 2004년 60⅓이닝을 던지고 만 33세의 나이에 MLB 경력을 끝냈다. 현지 언론들은 지금도 “설리번은 당시 너무 많이 던졌다”라고 혹사의 아이콘처럼 말한다.
만 37세의 나이에 무려 불꽃을 태운 스파크는 2004년 선발로 18경기에 뛰는 등 총 29경기에서 120⅔이닝을 던진 뒤 역시 MLB 경력이 끝났다. 에인절스의 허리를 든든하게 지키며 ‘고무팔’(진짜 별명이 그랬다)로 찬사를 받은 쉴즈는 만 31세 시즌이었던 2007년부터 이상 징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2008년 63⅓이닝, 2009년 17⅔이닝, 2010년 46이닝을 던지고 은퇴를 선언했다. 만 34세였다. 역시 가지고 있는 기량에 비해 너무 빨리 하락세가 찾아왔다. 다리 부상이 결정적이었다. 수술 후 전혀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프록터는 어깨에 문제가 생겨 수술대에 올랐다. 양키스에서 그를 100이닝 불펜 요원으로 만든 조 토리와 또 다저스에서 만난 프록터는 2007년 86⅓이닝, 2008년 38⅔이닝으로 현격한 하락세를 타더니 결국 2009년 수술대에 올라 한 시즌을 날렸다. 만 32세 시즌이었다. 결국 그는 2011년을 끝으로 MLB 무대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모타가 만 38세까지 꾸준히 활약한 것이 예외지만 그도 다시 100이닝을 던지지는 않았다.
이런 그래프를 보면 불펜 100이닝 투수들은 대개 1~2년 정도 더 불꽃을 태우다 급속도로 내리막을 걸은 것을 알 수 있다. KBO 리그에서도 2000년 이후 불펜 100이닝 투수는 총 11명이 나왔으나 이듬해까지 좋은 활약을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안식년을 가지거나 혹은 커리어가 급속도로 내리막을 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불펜 100이닝이 쉬운 일은 아님을 말해준다. 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팬들이 '혹사'라는 단어에 민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한화와 코칭스태프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두 선수의 시즌 뒤 관리다. 김성근 감독은 SK 시절 많이 던진 투수들이나 부상자들을 재활캠프에 합류시키는 등 여러 측면에서 배려를 했다. 한화도 아마 비슷한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다만 찜찜함은 남는다. 그렇게 관리를 받았던 선수라고 해도, 채병룡 고효준 윤길현은 수술대에 올랐으며 이승호 정대현 송은범은 경력이 내리막을 걸었고 전병두는 아직도 실전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만약 권혁이 32억이 소모되는 4년 내내 건재할 수 있다면, 그의 관리 비법은 MLB에서 배워가야할 수 있다. 역사와 숫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결론은 2~3년 뒤에 나올 것이다. /skullboy@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